혈압이 높아졌는데요. 약이 떨어졌던가요” 서방님도 의사인 여의사 닥터 리는 나의 주치의이다. “아닙니다. 약은 있습니다... 아껴서 먹느라고” 닥터 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 시선은 먼 허공을 주시하고 있다.
“그 때는 그랬지요! 그 심정 이해가 갑니다. 저도 공부할 때 신문지 빈 칸에 수학 공식 연습하였으니깐요” 닥터 리는 약을 한주먹 쥐어주며 사정한다. “약은 시장기 떼우는 고구마 같이 아껴먹는 것이 아니라 제 때 제 시간에 맞춰 먹어야 합니다” 미국에 와서 모처럼 들어보는 신선한 말이다.
지금 나는 약을 한 주먹 손에 쥔채 브로드웨이를 걸어가면서 생각한다.
“빈곤이란 무엇인가!” 많은 동포들이 조국에 금송아지를 놓고 올 때 나는 가난을 놓고 왔다. 그래서 나는 가난이 무엇인가를 안다. 가난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돈에 집착하고, 돈에 미쳐 돌아가고! 급기야는 인생을 송두리채 돈에 착취당하고 빈 손으로 죽어간다. 그러나 나는 가난이 위대한 창작의 어머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비장한 인간의 창조적 저력은 풍요로운 창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허기진 창자를 움켜쥐는 정신력 속에서 솟아난다는 역사의 현장을 나는 알고 있다.
런던 시립도서관 한 구석진 곳에 투박한 놋쇠덩이 같은 수도꼭지가 달려있는 방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바로 칼 마르크스가 허기진 창자를 수돗물로 채우면서 ‘자본론’을 집필하던 방이다. 마르크스는 순전히 배가 고파 집필을 중단하곤 했다. 그 때마다 마르크스는 친구 엥겔스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 편지에는 배가 고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오직 자본주의의 모순을 욕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일색이다.
엥겔스는 그 비판과 욕의 농도에 따라 수표의 무게를 조절하여 보냈다. 욕을 많이 하면 배가 많이 고프고 적게 하면 배가 덜 고프고! 후일 엥겔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로부터 편지가 두절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렸다고.
왜! 편지의 두절은 바로 ‘자본론’의 집필을 굶주림으로 인해 포기했던가, 아니면 굶어 죽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래 전의 일이다. 화가 반 고호의 특별전시회를 찾아 워싱턴 DC 의 미술관에 들어섰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일본 우에노 미술학교에서 온 미술선생의 인솔하에 일단 학생과 합류하여 관람했다.
미술선생으로부터 알찬 설명을 들으면서 이동해 가던 우리 일행은 어떤 설치물 앞에 가서 섰다. 앞으로 약간 경사진 테이블 위에는 미완성 인물화가 그려져 있는 하얀 천(캔버스가 아닌)과 그 옆에는 몇 통의 편지가 놓여 있다. 미술선생이 설명한다. “이것은 침대 시트에 그린 고호의 미완성 인물화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고호의 친구인 의사 가제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미술선생은 그 가운데 한통의 편지를 읽었다. 내용은 다 기억할 수 없으나 지금도 내 가슴을 쥐어짜는 몇 대목은 이러했다. “몹시 배가 고프다, 현기증 때문에 화폭이 잘 보이지 않는구나, 친구야! 캔버스가 없어 그림을 그릴 수가 없구나. 캔버스가 아니더라도 좋다,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아무거라도 좋다.친구야, 그림이 그리고 싶구나…”
학생들은 흐느끼고 있다. 한 학생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열한다. 고호의 빈곤이 창출한 위대한 드라마가 내 눈앞에서 연출되고 있다. 캔버스 대신 자신의 침대시트를 벗겨준 친구 가제트! 고호가 그린 친구 가제트의 초상화는 1990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일본인 사이도에게 8,250만달러에 팔렸다. 허기진 창자를 그림으로 극복한 고호! 빈곤은 그에게 창작의 어머니였다.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의 모태는 가난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를 보라! 모녀가 홍수를 피해 언덕받이에 올라섰다. 오랜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만삭이 된 산달에 유산을 하고만 딸을 부축하며 언덕위에 있는 빈 농작물 창고에 들어섰다. 어둑한 실내 한 모퉁이에 피골이 상접한 40대의 남자가 담요에 싸여 누워있고 그 발밑에 10대의 소년이 앉아있다. 소년이 비실거리며 다가온다.
“우리 아버지가 굶어 죽어가고 있어요. 다른것을 먹으면 다 토해버려요. 우유를 먹어야 해요, 우유를…” 소년을 돌려보낸 어머니는 딸을 껴안고 그의 눈을 주시한다. 무엇인가를 필사적으로 암시하는 그런 눈초리로 딸을 응시한다.
드디어 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엄마의 마음 알아들었어 그렇게 할게” 엄마의 품에서 벗어난 딸은 조용히 걸어가 소년의 아버지 곁에 누웠다. 그리고 자신의 젖꼭지를 사나이의 입에 물렸다. 소설 ‘분노의 포도’의 마지막 대목이다.
작가 존 스타인백은 배고픔을 휴머니즘의 극치로 승화시켰다. 어떤 성서가 어느 경전이 여기에 필적하겠는가. 모든 종교, 철학, 그리고 문학의 산실은 바로 가난이었다. 풍요속에서 빈곤을 씹어야 하는 이민생활도, 눈물의 베이글을 씹던 이민 초기의 정신력으로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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