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워싱턴 D.C. 미장원에서 일하던 때의 일이다. 우리 미장원 주인은 블론드 머리에 옅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전통적인 독일 중년 부인으로 이름은 에밀리야 라고 불렸다. 큰 바위 두짝 같이 뚱뚱한 허리에 훌쭉하게 직선으로 뻗은 두 다리가 애처로울 정도인데도 다리 아프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또 이 곳에는 넬리라는 스페인 아가씨가 에밀리야가 오기 전 이미 이곳에서 일해 왔다. 이전 주인 헬렌이 은퇴하면서 넬리에게 업체를 인계해 줄 뜻이 있었으나 넬리가 인수받을 의향이 없어 대신 후배인 에밀리야가 주인이 됐다고 한다. 후배가 선배를 제치고 주인이 됐는데도 넬리와 에밀리야는 단짝친구다. 그 두 사람의 대화의 화음은 척척이다. 미장원에 라디오가 없는 터라 두사람의 대화는 하루종일 틀어놓은 라디오의 토크 쇼 같아 피곤을 덜어준다. 그뿐인가. 가끔 폭소까지 터져 나오니 그때는 일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넬리의 웃는 눈과 입 모습은 모나리자 입보다 더 이쁘다. 에밀리야는 독일인, 넬리는 스페인, 나는 한국인, 샴푸 걸은 미국인, 청소부는 영국인 부부, 우리 미장원은 작은 국제사회다. 처음엔 에밀리야와 넬리의 액센트 강한 영어에 어리둥절했으나 얼마후 익숙해졌다. 에밀리야의 그 착한 성품이 나를 그와 함께 오랫동안 일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어느날 퇴근시간에 넬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진(JEAN), 너 에밀리야 아들 결혼하는 거 아니?"하고 물어왔다. "모르는데, 언제 결혼하니?" 하며 놀라면서 묻자 "두 주 후 토요일에 하는데 너랑 나랑 뭔가 선물을 해야 할꺼야, 그치?"하며 그 예쁜 눈으로 내 의향을 묻는다. "그럼 해야지. 어쩌면 내가 여태까지 몰랐지?"하자 "JEAN! 우리 둘이 똑같이 5불 이상 선물은 안하기로 약속하자"한다. "그래, 나도 돈 없어" 하고 둘이서 약속했다.
그 주말에 5불짜리 결혼 선물을 사러 한국가게를 돌아다니며 찾던 중 마침 자개 박힌 작은 꽃병이 한쪽 구석에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가격은 5달러 몇십센트, 내가 찾고 있는 바로 그것 이었다. ‘아이쿠 잘 됐다, 바로 이것이다’하며 손으로 먼지를 닦아내고 이리저리 돌려보니 아주 예쁜 자개 꽃병이었다. 내것으로도 하나 사고 싶었으나 참고 그것을 사다 예쁘게 포장해 두었다.
그 다음주 에밀리야가 퇴근시간에 날 보고 "JEAN, 내 옷 사러 가는데 구경하러 갈래?"하고 묻는다. 나는 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LORD AND TAYOLR에 가서 푸른색 드레스를 골라 거울앞에서 입어보는데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 불론드 머리와 푸른 눈동자에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원더풀’을 연발했더니 그 옷을 사기로 곧 결정해 버렸다.
다음날 내가 산 꽃병을 건네주자 덧니 두 개를 내보이며 놀라움과 함께 땡큐을 연발한다.
그 꽃병을 주며 "에밀리! 너는 네 아들 결혼선물에 뭐 해줄거니?"하고 물어보았다. "타올 석장"하며 나를 쳐다본다. "어머나 아들 결혼 선물에 타올 석장 선물하나?"하며 놀래자 "큰 것 하나, 중간치 하나, 작은 것 하나.그럼 너의 나라는 아들 딸 결혼때 뭘 선물하니?"하며 내게 묻는다.
"제각기 다르지. 부자는 집도 사주고 자동차나 TV같은 것도 한다"는 내 말을 듣자 "너희 나라는 부자구나"하며 놀랜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못해준다. 빈손으로 이민왔는데 뭐"하자 "JEAN, 괜찮다. 아무 것도 안해줘도 상관없어. 집이나 냉장고 TV 같은 건 자기네들이 살아가면서 체험으로 한가지씩 마련해야 재미있고 보람되지, 부모가 다 해줘버리면 자기네들이 해야할 일이 없어져 버린다. 공부시켜 키워놨으면 됐지, 언제까지나 남을 의지하게 해서는 안되지. 가난을 경험하면서 살아가야 돼"하는 에밀리야의 훈계는 내 마음속 교훈이 되었고 위로가 됐다.
"자식은 가난하게 키워야 한다"라는 미국 속담과도 상통하는 것을 보고 그 민족들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근면과 질투심 없는 검소함이 IMF와 같은 세계를 향해 도움의 손을 펴지 않아도 되는 승리자들로 만들었지 않나 싶다. 이와 함께 1억원을 들여 딸 결혼식을 치렀는데도 너무나 빈약한 결혼식이었다고 푸념하던 어느 어머니의 목소리가 되살아 들려 왔다. 지금도 가끔씩 생각나는 20여년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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