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장을 무너뜨린
▶ 김병현, 2점차 리드 못지키고 역전패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할로윈 밤의 심술인가, 양키스의 매직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한국인으로 사상 최초로 월드시리즈 마운드에 오른 김병현의 영광의 밤이 한순간에 악몽의 밤으로 돌변했다. 가장 기쁘고 영광스러워야 할 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악몽이 됐고 손안에 들어왔던 승리와 영광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한국형 핵잠수함’ 김병현(22)이 할로윈 밤인 31일 뉴욕 양키스테디엄에서 벌어진 2001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포스트시즌의 황제 뉴욕 양키스의 ‘매직 어뢰’ 두 방을 맞고 침몰했다. 8회말 3대1 리드를 안고 마운드에 오른 김병현은 첫 3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며 쾌속 항진했으나 끝내 마지막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지 못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9회말 투아웃후 양키스 4번타자 티노 마티네스에 통한의 동점 투런홈런을 맞아 승리와 세이브를 날린 데 이어 연장 10회말에는 데릭 지터에 끝내기 솔로홈런을 맞고 패전투수의 멍에까지 쓴 것. 월드시리즈 통산 27번째 타이틀이자 4연패를 노리는 양키스는 1대3으로 뒤지던 9회말 2사후 드라매틱한 마티네스의 투런홈런으로 동점을 만든 뒤 10회말 지터의 끝내기 홈런으로 4대3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2패후 2승을 따내 시리즈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반면 이날만 이기면 3승1패의 절대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었던 D백스는 믿었던 김병현이 승리 일보직전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양키스의 무서운 저력을 톡톡히 실감했다. ‘양키스의 매직’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경기였고 피니시라인을 눈앞에 두고 나락으로 추락한 김병현으로서는 평생 잊기 어려운 통한의 밤이었다.
김병현과 D백스로선 빨리 잊고싶지만 경기 자체는 한껏 당겨진 활시위처럼 시종 팽팽한 균형의 박진감과 긴장감이 가득했던 역사에 기록될 명승부였다. 1차전에 이어 4일만에 다시 마운드에 오른 D백스 에이스 커트 쉴링은 3회말 스캇 브로셔스에 솔로홈런을 맞아 선취점을 내줬으나 7회까지 양키스 타선을 3안타 9삼진으로 잠재우는 경이적인 역투를 했다. 하지만 생애통산 포스트시즌에서 9승2패, 방어율 2.54를 기록했던 양키스 선발 올랜도 허난데스도 만만치 않았다. 컨트롤 난조로 1회 1사 만루, 3회 1사 1,2루의 위기를 맞으면서도 마치 서커스 줄타기 곡예처럼 아슬아슬하게 실점을 모면하고 4회초 마크 그레이스에 솔로홈런으로 1점을 내준 것 외에는 7회 1사까지 산발 4안타 1실점으로 호투, 양키스에게 희망을 안겼다.
1대1로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던 경기가 갑자기 저울추가 기운 것은 8회초. D백스는 1사후 루이스 곤잘레스의 중전안타에 이어 이루비엘 듀라조의 중월 2루타로 균형을 깨는 2번째 득점을 뽑아냈고 홈 송구때 3루까지 간 듀라조의 대주자 미드레 커밍스가 맷 윌리엄스의 숏 땅볼 때 홈인, 리드를 3대1로 벌리자 D백스의 승리는 손안에 들어온 듯 했다. 더욱이 쉴링에 이어 8회말 마운드에 오른 김병현이 셰인 스펜서, 브로셔스, 알폰소 소리아노를 잇달아 삼진으로 돌려세우자 D백스의 승전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누가 ‘야구는 9회말 투아웃부터’라고 했는가. 운명의 여신은 그 누구도 예상 못했던 가혹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재앙의 발단은 9회말 1사후 폴 오닐이 빗맞은 좌전안타를 치고 나가면서 시작됐다. 다음타자 버니 윌리엄스를 삼진으로 돌려세워 투아웃을 잡은 김병현은 어쩌면 마지막 타자가 될 수 있는 마티네스를 상대로 초구 스트라익을 잡기 위해 바깥쪽 직구 스트라익을 던졌으나 마티네스는 이를 놓치지 않고 끌어당겨 경기장 한복판을 가르는 극적인 동점 투런샷을 터뜨렸고 양키스는 순식간에 열광의 도가니로 화했다.
생애 가장 뼈아픈 홈런을 맞은 김병현은 겉으로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이미 속은 골병이 들었다. 이후 악전고투하며 간신히 9회를 추가 실점없이 마쳤다. 하지만 경기가 연장으로 넘어가자 믿을만한 불펜요원이 전무한 D백스 밥 브렌리 감독은 이미 2이닝을 던진 김병현을 다시 연장 10회말 마운드에 올릴 수밖에 없었고 김병현은 첫 2명을 범타로 잘 잡았으나 끝내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또 다시 투아웃 홈런을 맞은 뒤 고개를 떨구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할로윈 밤의 악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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