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우리는 ‘나라님’에 관한 한 박복한 민족이다. 이조 500년 역사를 훑어보아도 위대한 성군(聖君)은 다섯 손가락을 채우지 못한다. 후세의 사가들에 의해 대왕으로 호칭된 임금은 세종과 정조뿐이다. 헌정사에 들어 와선 어떤가. 물으나나다. 반세기동안 8명의 대통령이 탄생했지만, 백성들로부터 진솔한 존경을 받는 지도자는 없다. 외국에선 흔히 볼 수 있는 기념관 하나 세워지지 않은 게 이를 잘 말해 준다.
얼마 전 정부는 제주도에 ‘정상외교 기념관’ 건립 계획을 발표했다. 야당과 일부 언론이 "좋소"하고 찬성할 리가 없다. 말이 그렇지 그 내막인즉 남북 정상회담을 기리려는 ‘DJ 기념관’의 변형이라며 극력 반대했다. 역대 대통령을 기념하는 일들에 국민들 반응도 늘 시큰둥하다. 뭘 잘한 게 있다고 기념관을 만드느냐는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백성들 가슴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한 참 지도자가 있다면 기념관이 아니라 그 보다 더한 ‘전당(殿堂)’인들 못 만들어 주겠는가."
지난 98년 2월, DJ가 천신만고 끝에 청와대를 접수할 때만 해도 그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컸다. 반독재 민주화 투사의 집권을 시대적 요청으로 받아들인 이도 있었고, 30여년을 통치한 영남지역과 일부 엘리트 집단의 퇴장, 그리고 그 기간에 소외당한 호남지역과 사회 저층의 상대적 신분상승이 국가의 균형된 발전을 가져오리라고 믿는 이도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국민들은 DJ가 내놓은 약속들을 철석같이 믿었다. "다시는 이 나라에 정치보복이니, 지역차별이니, 부정부패니 하는 말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 뿐인가. 검찰의 엄정 중립, 언론자유 보장, 기본인권 보호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약속을 내놓았다. 임기를 꼭 1년4개월 남겨 놓은 지금, 과연 그 ‘철석같은 공약’은 과연 제대로 지켜졌는가. 나는 여기서 그 이행 여부를 일일이 따질 생각은 없다. 따진다는 것 자체가 지면낭비요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이유는 명백하다. 각론을 종합한 총론에서 "아니올시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음으로 해서다.
이런 총평에 대해 집권 세력들은 물론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YS가 떠넘긴 IMF 사태를 극복했고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한반도 안정을 가져왔고 노벨 평화상으로 국제적 위상을 높인 DJ야 말로 "우리나라 최고의 聖君"이라고 추앙하고 있다. 그렇게 믿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하지만 그들은 중대한 한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바로 국민들의 존경과 믿음이 떠났다는 냉혹한 현실이다. 지도자의 언행에 대한, 그리고 집권세력들의 됨됨이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그 믿음은 왜 무너졌는가.
문제의 발단은 취임 초로 올라간다. 당시 DJ가 제일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했어야 할 일은 자신에 대한 철저한 고해(告解)였다. 과연 어두운 돈을 받은 적은 없는가. 세상이 다 아는 ‘20억 플러스 알파’라는 수상쩍은 자금과 관련해서 광주 비극의 가해자인 노태우로부터 그런 돈을 받은 것은 떳떳한가 아닌가. 한마디로 자신의 과거부터 청산하는 수범을 보였어야 옳았다.
두 번째는 진정으로 용서(容恕)하는 넉넉한 마음이었다. 자신과 호남에 대한 과거 정권의 잘못을 큰마음으로 용서하고 국민적 화해를 솔선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선 호남 출신을 권력 핵심에 박는 또 다른 지역주의를 과감히 버렸어야 했다. 그러나 DJ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 번째는 마음을 비우는 일(空心)이었다. 3전4기(三顚四起), 80을 앞두고 몽매에 그리던 정상에 오른 것으로써 자신과 가문과 호남의 한을 풀었다고 만족해야 했다. 임기 이후에도 무언가 욕심을 낸다면 과욕이요 노욕(老慾)이란 말을 듣기 십상인데, DJ에게 그런 눈초리를 보내는 이가 적지 않다.
나는 이를 총칭해 ‘삼심(三心)의 구도(求道)’라고 칭하고 싶다. 고해-용서-공심, 그렇다. DJ는 여기서 실기하고 실패했다. 자신은 고해하지 않고 남(야당)의 비리만 캤다. 말은 탈지역성을 강조하면서 호남 편애로 일관했다.
무리한 북한 지원은 DJ가 마음을 비우지 않았다는 증좌로 오해받고 있다. DJ가 진정 마음을 바꾼다면 지금도 늦지는 않았다. 오늘 당장에라도 이 삼심의 구도자적 면모를 보여준다면, 국민들은 "사랑해요 DJ"를 다시 찬하고 ‘김대중 기념관’을 멋지게 세우자고 성금을 걷는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것이다. 그렇게 될 때 DJ는 "위대한 정치 지도자"로 기록되는 최초의 대통령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당사자의 마음가짐(用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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