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엄마’하고 집안으로 들어올지 몰라 대문을 잠그지 못하고 있습니다." 월스트릿 진출을 노리는 젊은이들이면 누구나 입사하고 싶어하는 월스트릿 최대 채권 거래회사인 ‘캔터 피츠제럴드’에서 합격통지를 받고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으면서도 "부모님이랑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며 의젓하게 부모를 먼저 생각하던 크리스티나(25·육성아).
너무나 착하고 똑똑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던 크리스티나를 잃은 아빠 육대진씨는 밤새 뒤척이다가 조그만 소리라도 들리면 "우리 딸, 크리스티나가 왔다"고 뛰어내려간다.
최근 뉴욕시로부터 사망확인서 한 장을 받고 오는 13일 오후 6시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인근 성클레런스 성당에서 거행될 장례 및 추모미사를 앞둔 가족들은 오늘도 찢어지는 가슴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
육양은 명문 미시간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던 중 딱 1년만 실무경력을 쌓아보겠다며 뉴욕생활을 시작, 월드 트레이드센터 노스타워 101층 캔터 피츠제럴드사 인사관리부에서 근무하다 테러참사 이후 지금까지 연락이 없다.
자신의 장래를 위해선 당연히 뉴욕으로 가야하지만 부모 걱정으로 뉴욕행을 고민하던 크리스티나에게 그래도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던 고모 박우엘씨는 지난주 크리스티나의 부모인 육대진·경우씨를 방문하고 "그 당시 뉴욕 근무를 추천했던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하다"며 "고모인 내가 이런데 부모의 심정은 오직 하겠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지라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인데…"라며 말을 잊지 못했다.
무남독녀를 잃은 슬픔에 매일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버지 육씨는 식탁 위에 올려놓은 사진을 마주하고는 도저히 밥알이 목에 넘어가질 않는다며 크리스티나의 사진액자를 돌려놓지만 몇 숟갈 뜨지 않아 결국은 식탁을 떠나고 만다. 크리스티나의 방을 정리하다가 커다란 가방에 차곡차곡 모아둔 볼펜이며 조그만 수첩, 스티커, 머리핀을 발견하고는 "크리스티나가 그 동안 돌보던 입양아들과 불우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이 기다릴텐데…"라고 중얼거리는 어머니 이경우씨도 눈물과 한숨의 나날을 보내고 있어 주위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 입양아의 대학생 대모
크리스티나는 미시간 대학생들 사이에서 ‘한인 입양아의 대모’로 불렸다.
지난 98년 미시간 대학 한인 학생회가 개최한 ‘한국 문화예술축제’ 행사의 코디네이터를 맡았던 크리스티나는 한인 입양아 200여명을 초청했다.
주로 백인 가정에 입양돼 한인 커뮤니티나 한국 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는 이들에게 ‘한국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심어줘야 한다며 입양아들에게 부채춤과 한국 역사를 가르쳐주고 한국음식을 맛보게 하는 등 크리스티나는 한국 문화에 대한 애착과 한국인이란 긍지가 남달랐다.
게다가 크리스티나는 방학을 맞이하면 성당 친구들과 함께 선물 꾸러미와 음식을 싸들고 인근 양로센터와 고아원을 찾아다닐 정도로 커뮤니티 봉사에도 적극적이었다.
▲ 알츠하이머협회 자원봉사
크리스티나가 4세가 되던 1980년 육씨 부부는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밤낮으로 일하는 부모를 항상 걱정하고 한번도 속썩인 적이 없었고 부모를 대신해 할아버지 품에 자라선지 할아버지를 끔찍이 사랑했던 크리스티나는 4년전 할아버지가 알츠하이머로 죽음을 맞이하자 알츠하이머 협회를 찾아가 자원봉사자를 자청했다.
워낙 밝고 다정다감한 성격을 지닌 크리스티나. 어린 시절부터 실종되기 전까지 친구들이 유난히 많았고 친구들의 어려움이나 고민은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없어 친구와 후배들의 카운슬링은 도맡아 해왔다. 초·중·고교는 물론 대학까지 크리스티나와 함께 다닌 미셸 한양(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법대)은 테러참사로 크리스티나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뉴욕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크리스티나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친구는 미셸뿐만이 아니었다. 40여명의 친구들이 만사 제쳐두고 세인트 병원과 벨뷰병원, 참사현장 등 뉴욕 일대를 누비며 크리스티나를 찾는데 온갖 정성을 쏟았다.
▲ ‘크리스티나 성아 육 재단’ 설립
"크리스티나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밤낮으로 헤매고 다닌 친구들의 노력도 하늘을 감동시키진 못했는지 결국은 장례를 치르게 됐다"며 절망의 한숨을 짓는 미셸양, "크리스티나는 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생각하는 친구"라고 회상하는 앤드류 최군(뉴욕 의대), 짧으나마 뉴욕에서 룸메이트를 했던 조이스 루양 등. 이들 모두가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주위사람들을 정말 미치게 하는 것은 크리스티나의 생사조차 확인이 안 된다는 것"이라며 "차라리 크리스티나가 죽었다고 누군가 말해주면 좋겠다"는 말로 참담함을 드러내는 육씨 부부는 회사측으로부터 받게될 보상금과 주위사람들이 보내준 조의금으로 ‘크리스티나 성아 육 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크리스티나가 돌보던 입양아나 알츠하이머 환자를 위한 봉사단체로 등록될 이 재단을 통해 어릴 적부터 사회봉사기관을 운영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크리스티나의 꿈과 사랑이 실현되길 바랍니다" eunseonh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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