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발발 일보 직전에 와 있는 아프가니스탄은 한인들에게 생소한 나라다. 그러나 앞으로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정치 경제 군사적 판도가 크게 뒤바뀔 전망이다. 런던 타임스 기자를 20년 간 역임하면서 중앙 아시아 지역을 집중적으로 취재해 온 피터 홉커크가 쓴 ‘위대한 게임’(the Great Game, 고단사 간/ 565면, 16달러)을 통해 이 지역이 어떤 곳이며 왜 중요한 가를 살펴본다.
‘Great Game’이라는 용어는 러드야드 키플링의 시 ‘Kim’중 ‘Now I shall go far and far into the North, playing the Great Game...’에서 따온 말로 중앙 아시아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각축전을 뜻한다.
뉴욕 타임스등 주요 언론의 극찬을 받은 이 책은 서쪽으로는 러시아 남쪽 코카서스에서 지금 아프간 공격 전진기지로 미군이 들어가 있는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동쪽으로는 파미르고원에서 티벳에 이르는 광대 무변한 지역에서 벌어진 역사를 어떤 드라마보다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 하나 하나도 소설의 주인공이 될 만큼 흥미로운 인물들이다.
키바와 코칸드, 보카라와 치트랄등 이국 도시들을 배경으로 19세기 초부터 1905년 러시아가 일본에 패해 아시아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100년 간 벌어진 싸움을 보며 느끼는 것은 혹한과 혹서, 이교도와 떼강도의 위협을 아랑곳 않고 사막과 태산을 넘나드는 양국 젊은이들의 패기다. 당하는 쪽에서는 침략전쟁의 앞잡이라고 비난하겠지만 대제국 건설이 거저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이 ‘위대한 게임’의 주무대가 바로 아프간이다. 어떻게 해서든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 부동항을 갖겠다는 러시아의 야심과 대영제국 최대의 보물 영국을 지키겠다는 영국의 결의가 맞부딪친 곳이 바로 여기기 때문이다. 아프간은 동서는 물론 남북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다는 운명 때문에 아리안 족부터 알렉산더. 페르샤와 몽골등 숱한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왔다. 군대뿐만이 아니고 ‘서유기’의 모델이 된 현장법사나 당나라의 혜초 스님 등도 모두 불경을 배우기 위해 서역(인도)으로 갈 때 아프간을 거쳤다.
지금 아프간 하면 수십 년 간 전쟁에다 탈레반의 횡포로 폐허가 된 나라를 연상하게 되지만 원래는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서남 아시아의 정원’이었다. 인도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독충에 질린 영국군 부인들은 한번 이곳에 와 보고는 맑고 상쾌한 대기와 잘 경작된 농장에 반해 주저앉는 일이 많았다. 아프간 인으로서는 사상 최대의 승전이자 영국군으로서는 최대의 치욕인 1842년 전투 때 여성과 아동 등 영국 민간인 피해자가 유독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영국인들에게 ‘아프간 대재난’으로 알려진 이 사건의 발단은 영국과 러시아의 세력 다툼이다. 중앙 아시아에 산재해 있던 투르크 족과 몽골의 후예 타타르 족을 하나씩 제압하며 인도양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는 아프간의 왕 도스트 모하메드에게 추파를 보내기 시작한다. 전통적으로 자신의 세력권이던 아프간에 러시아가 진출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러시아와 손을 끊으라는 경고를 보낸다. 그러나 모하메드가 말을 듣지 않자 이를 쫓아내고 권력 투쟁에 패해 망명 중이던 슈자를 왕으로 앉히기로 하고 1838년 1만5,000명의 대군을 파견한다.
영국군은 어렵지 않게 아프간 군을 물리치고 카불에 입성하지만 처음부터 좋지 않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슈자에 대한 아프간 인들의 반응이 예상과는 달리 냉담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동안은 영국의 뜻대로 되어 가는 듯 보였다. 러시아 세력은 축출되고 슈자는 영국이 원하는데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그러나 불과 3년 후 영국의 꼭두각시 슈자 정권에 분노한 아프간 인들은 폭동을 일으켜 우선 침략군을 이끌고 들어온 알렉산더 번즈를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그는 아프간 통으로 한때 모하메드 왕과 친분이 두터웠던 인물이다. 슈자도 함께 살해당한 것은 물론이다. 갑자기 3만에 달하는 무장 게릴라에 포위된 영국군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 보고 백기를 들었다. 항복 조건으로 퇴각하는 군인과 가족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이는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인도로 넘어가는 길목인 카이버 고개에 이르는 동안 게릴라의 습격을 받은 영국군은 단 한 명만 살아남고 몰살하는 참변을 당해야 했다.
그 후 영국은 토벌군을 보내 아프간 반군들에 가혹한 보복을 하지만 허수아비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쫓아냈던 모하메드 왕을 다시 원위치 시킨다.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낭비하고 얻은 것은 아프간 인의 증오뿐이라는 참담한 결과였다.
이 사건은 160년 전 일어난 일이지만 축출된 아프간 왕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워 탈레반 타도 후 임시 정부 구성을 꾀하고 있는 미국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프간은 복잡한 역사와 험난한 지형으로 수십 개 부족이 갈라져 으르렁대는 나라다. 정복하기도 어렵지만 정복한 후에도 허수아비 정권을 앉혀 다스리려는 것은 현실성이 희박하다. 탈레반 전복은 시간 문제라 하더라도 그 후 일이 순탄하게 풀려 여러 부족의 지지를 받는 단일 정부가 구성돼 내전을 종식시키고 더 이상 이곳이 테러범들이 소굴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1990년 발간한 이 책의 저자는 서문에서 “한 때 ‘위대한 게임’의 무대였던 이곳은 공산주의 몰락과 회교권의 발호와 함께 다시 세계 열강이 각축을 벌이는 ‘신 위대한 게임’의 무대가 될 것”으로 전망했는데 최근 사태를 보면 그의 예측이 맞아들어 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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