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미국인 인가."(Are You American?)
미국 시민권자라도 선뜻 ‘예스’라는 대답을 하는 한인 1세는 그리 많을 것 같지 않다. 영어로 대답한다면 아마도 머뭇거리며 이런 식으로 대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싶다. "…Yes,…but Korean-American."
무차별 테러 공격에 무너지고 수천명이 숨지던 날. 한 Korean-American 여인은 미국 생활 20여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미국인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됐다고 했다.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맹렬한 분노가 치밀면서 다른 한편 자신이 미국에 속해 있음을 부지부식간에 깨달았다는 것이다.
"누가 미국인 인가." 빤한 것 같지만 그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이민으로 된 나라가 미국, 그러므로 조상을 들먹이며 ‘미국인의 정체성’(Identity)을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1790년 이었던가. 미국 사상 처음 센서스가 시작된 해가. 이 때는 인종 분류란에는 백인과 흑인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땅의 원주민인 아메리칸 인디언은 아예 미국인으로 카운트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근 한세기동안 이런 식이었다. 라티노를 별도의 인종으로 공식 분류하는 란이 생긴 것도 1970년에 이르러서다.
이 것은 무엇을 뜻할까.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의 일 수 있다. 말하자면 ‘백인만이 미국인’이라는 정의가 인종분포 변화와 함께 변화를 맞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을 말해주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해 관심을 끄는 게 게어리 거슬이라는 역사학자의 주장이다. 미국은 전쟁과 위기를 통해 국민적 일체감을 이루어왔고 그 때마다 새롭게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왔다는 게 그 주장의 대요다.
"전쟁은 국가방위의 목적은 물론이고 한 국민으로서 일체감 조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거슬 에 따르면 이 같은 ‘전쟁의 덕목’(?)을 가장 잘 이해한 대통령은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으로 이 때부터, 다시 말해 20세기 시작과 함께 태동된 미국적 내셔널리즘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시절 2차대전을 통해 1차 완성기를 맞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 미국적 내셔널리즘의 특성으로 그는 양면성을 지적하고 있다. ‘민주주의적 믿음’에 바탕을 둔 내셔널리즘과 레이시즘(Racism)에 바탕을 둔 내셔널리즘,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신념에 바탕을 둔 미국적 내셔널리즘은 포용적이다.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내셔널리즘은 전쟁 전에는 ‘열등 민족’으로 분류됐던 그룹, 예컨데 동구권 이민자, 유대인 등을 미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승격시켜 전후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새로운 광의의 합의가 이루어 졌다는 평가다.
그 합의는 그러나 어디까지나 ‘백색’을 바탕으로 이루어 졌다. 흑인계는 2차대전은 물론이고 1차 대전, 더 거슬러 올라가 남북전쟁에도 참여했으나 여전히 제외됐던 것. 이는 미국적 내셔널리즘의 다른 얼굴, 즉 레이시즘적 내셔널리즘 탓이다. 이 내셔널리즘은 배타적이다.
이 다른 얼굴의 내셔널리즘은 미국내 각 소수계 커뮤니티에 상당히 부정적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소수계의 참여를 은연중 가로 막았다. 그리고 강요된 애국심 경쟁 내지, 소수계의 소수계 박해 현상을 불러왔다.
이는 1차대전 때도 있었던 현상으로 폴란드계 등 동구 이민그룹의 독일계 박해가 그 예다. 2차대전 때는 필리핀계의 일본계 공격이 만연했다. "진주만 사건은 1880년후 처음으로 중국인들을 미국 시민으로 만들었다." 한 역사학자의 말이다. 말하자면 미국의 적(일본)으로 오해받아서는 안된다는 무의식적 ‘자구의 몸짓’이 이런 저런 형태로 발로됐다는 지적이다.
21세기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시대다. 다민족 사회가 오늘의 미국이다. ‘멜팅 팟’ 이론도 통하지 않는다. 문화적 다원주의의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내셔널리즘 ‘운운’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러나 2001년 9월11일. ‘제2의 치욕의 날’ 이후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아 보인다. 아랍계와 일부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그 와중에 한 인도계가 아랍계로 오인돼 피살됐다. 가해자는 라티노 성(姓)을 가졌다. ‘소수계의 소수계 박해 상황이 재현된 셈이다. 거리는 성조기의 물결이다.
문제는 애국심이 지나치면 맹목적 애국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데 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또 다시 테러가 발생 할 때 시대착오성 내셔널리즘이 다시 팽배할 수도 있다. 그러면 요구되는 게 희생양이다.
"당신은 미국인 인가." 당당히 ‘예스’라는 대답이 나올수 있게 커뮤니티가 지혜를 모아야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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