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하는 삶
▶ 김현덕<샌프란시스코 주립대 교수>
시시한 일로 꼬치꼬치 따지기 좋아하고, 일반 상식으로 생각할 수조차 없는 사소한 일에도 법정에 가서 왈가왈부하고,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놓고는 부모형제조차도 가리지 않고 매정하리만큼 따지는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이웃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거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미국 젊은이들의 모습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런데 이번 참사를 통하여 미국 젊은이들의 다른 모습을 보았다. 미국식 애국심을 보았다.
성조기를 차에 달고 다니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니다.
수혈 클리닉에서 헌혈을 하기 위해 질서를 지키면서 차례를 기다리는 장사진 속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았다. 목숨을 걸고 구조 작업에 참여하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습 속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았다. 조용히 묵념하며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았다.
가정이나 국가나 위기를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무척 중요하다. 위기를 당한 가정을 보자. 가족끼리 서로 뭉쳐서 위기를 극복하는 가정은 회복되지만, 위기의 스트레스로 인하여 서로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가정은 파괴된다. 이처럼 국가도 국난에 부딪쳤을 때 정부와 국민이 위기를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국운이 좌우될 것이다.
미국은 역사상 유례가 드문 이번 일을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미국 국민이 대통령을 앞세우면서 함께 똘똘 뭉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놀랐다. 선거를 전후로 대통령이 자격이 있다 없다 하면서 모욕하는 말을 서슴없이 던지던 민주당 정치가들도 대통령에게 전폭적으로 전쟁의 결정권을 위임하는 모습 속에서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보았다.
대통령을 비난하고 흠잡기 위한 인터넷 사이트조차도 휴업한다는 공고와 함께 대통령을 조롱하는 글을 올리지 않았다. 전쟁시 지도자를 지도자답게 대우하여야 한다는 애국심에서 나온 행위가 아닐까 싶다.
테러 사건으로 인하여 미국 경제가 악화될 것을 염려하여 증권을 팔지 않는 일이 애국하는 일이라는 광고와 함께 적십자에 헌금을 보내라는 호소문이 인터넷 여기 저기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희생자 가족들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이웃을 위로하여 주려고 각자 나름대로 애쓰는 모습을 본다. 스치면서 눈인사만 나누고 지내던 이웃이 “이번 일을 감당하기에 어렵지요” 하면서 빨리 걷던 걸음을 늦추고 안부를 물었다.
사거리에서 차가 갑자기 멈췄다. 평소 같으면 화를 내면서 사방에서 빵빵거릴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뛰어 나와서 차를 밀어준다.
교정에서 학생들이 서로 껴안고 위로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기숙사 방에는 촛불이 전등 대신에 켜지고, 축제 행사를 취소하며 자중했다. 평화봉사단원 가입 문의도 늘었다 한다. 테러사건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인생의 의미를 더 깊게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나 보다.
일요일 교회에서도 위기에 대응하는 미국 사람들의 숙연한 모습을 보았다. 말을 잃은 채 목사님은 설교 대신 침묵으로 예배를 인도하였다. 슬픔에 젖은 성도들은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묵상하면서 희생자들을 위하여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수백 명의 성도들이 앉아 있는데도 핀이 바닥에 떨어지면 들릴 것 같은 침묵 속에서 예배를 드렸다.
위기에 대응하는 미국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하면서 미국 국민이 무섭도록 자제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한계를 느꼈을 때 발길을 신의 전당으로 재촉할 줄 아는 영성 깊은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미국의 심장을 폭격한 테러사건은 미국을 분노의 도가니 속으로 넣어 테러리스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은둔하여 준 나라에 폭탄을 퍼부을 수도 있다. 이슬람교를 믿는 모슬람들을 미국에서 추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의 의견이고, 내가 만난 대부분의 학생들은 피를 피로 갚아서는 안 된다고, 테러의 참사에 분노하면서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길거리로 나가서 데모를 하는 그런 애국심이 아니다. 침묵하면서 깊게 생각하는 무서운 젊은이들. 평화와 자유가 미국인에게만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세계인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는 소견을 발표하는 젊은이들의 슬기로운 눈길 속에서 미국의 밝은 장래를 보는 것 같다.
테러리스트들은 잠자고 있는 미국인의 애국심을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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