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역사의 종언과 마지막 인간’이란 책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일본계 미국인인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쓴 이 책은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지구상에 등장한 수많은 정치제도와 경제제도 가운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가장 우월한 체제임이 역사의 심판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더 이상 체제 경쟁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단지 얼마나 더 많은 나라가 이를 수용하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다는 것이 골자였다.
최근까지 세계를 휩쓴 대세는 세계화의 물결이었다. 각 국의 무역 장벽을 없애고 상품과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해야 경제가 발달한다는 생각에 기초를 둔 세계화가 자본주의적 발상임은 물론이다. 이와 동시에 진행된 큰 조류는 민주화다. 바츨라브 하벨에서 넬슨 만델라, 코라손 아퀴노에서 김대중 대통령등 반체제 인사에서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결코 권력의 정상에 오를 수 없을 것 같던 인물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집권에 성공했다. 민주화라는 대세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와는 대조적인 시각으로 쓴 책이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간의 충돌’이다. 9월 11일 테러 사건 이후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이 책의 요지는 전 세계는 서구 기독교권과 회교권을 비롯한 고유의 문명권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들의 가치 체계가 현저히 다르기 때문에 물과 불처럼 공존할 수 없고 따라서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헌팅턴 본인은 이 사건이 ‘문명간의 충돌이 아니다’라고 부인했지만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한 테러 조직이 회교권에서 상당한 지지 세력을 갖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번 테러 사건이 났을 때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팔레스타인 난민들만이 어린아이에서 부녀자까지 손뼉을 치며 춤을 추는 장면을 TV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세계 여러 문명권중 왜 유독 회교권에서만 테러리스트들이 설쳐대는 것일까. 회교권은 지금은 가난하고 미국을 증오하는 테러범들이 들끓는 곳이지만 1,400년전 마호멧이 코란의 메시지를 전파할 때는 사정이 달랐다. 아라비아 사막의 오아시스를 오가며 행상을 하던 소부족에 지나지 않던 아랍족은 알라의 계시를 받은 덕인지 마호멧 사후 100년 만에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중동과 페르샤, 중앙 아시아와 인도 북부에서 동쪽으로는 파미르고원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유례 없는 업적을 이룩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남쪽 프와티에에서 칼 마르텔이 아랍군에 승리함으로써 이들의 유럽 정복을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로마 제국 쇠망사’를 쓴 영국의 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여기서 졌더라면 지금 유럽인들은 아랍 말을 하며 코란을 외우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동쪽에서도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중국군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어디까지 이슬람 세력이 번졌을지 모를 일이다.
회교권은 AD 1200년까지 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과학, 예술, 문학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유럽을 압도했다. 유럽 근대문명을 가능케 한 아라비아 숫자도 아랍인들이 유럽에 전달했으며 그리스 로마의 역사 철학 문학을 유럽에 소개한 것도 아랍인들이었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란 구호와는 달리 아랍인들은 이교도라도 세금만 내면 자기 종교를 믿을 수 있도록 관대히 대했으며 타민족의 관습과 사상의 자유를 존중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몽골족의 침입과 내부 사회 조직의 경화 등으로 몰락의 길을 걸은 이후 지금까지 서구 기독교권과의 싸움에서 기를 피지 못하고 살아왔다. 한 때는 야만인으로 우습게 여기던 유럽인들한테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오히려 눌려지낼 수 없는 현실에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거의 한결 같이 부패한 왕정이거나 독재 정권인 회교국가의 지도자들은 국민들의 외국에 대한 분노를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 앞으로도 삶이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은 채 가난에 시달리는 이곳 젊은이들에게는 세계 최강의 수퍼 파워인 미국과 맞서 ‘성전’을 벌이다 산화하는 것이 영웅시될 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실력과 심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실력으로 인정을 받든지 아니면 심통으로라도 버텨야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다. 지금 아랍권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심통난 청소년의 심리 상태와 비슷하다. 이렇게 볼 때 과연 테러 조직 몇을 때려잡는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빈 라덴이 죽더라도 그는 순교자로 추모되고 그 뒤를 이을 추종 세력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인권의 존중과 물질적 풍요로움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것이 회교의 근본 원리와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은 터키나 말레이시아의 예가 입증한다. 회교권이 하루 빨리 이 체제를 받아 들여 정치 경제적 선진화를 이룩하지 않는 한 테러는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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