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과 이일은 이조 선조(宣祖) 때 사람으로 당시 가장 명망이 높았던 군지휘관들이다. 그러나 막상 위기가 발생하자 그 기대는 일조에 무너졌다. 초전에 패군지장이 됐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반면 무명의 지휘관이었다. 왜란발생과 함께 그는 그러나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술주정뱅이에 게으름뱅이로 정평이 났던 유리시즈 그랜트는 평화시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 인물이었다. 남북전쟁이 결국 그랜트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한니발의 로마 침공 때 애숭이에 불과했다. 그런 그이지만 몇년후 유명한 자마회전에서 그 무시무시한 한니발을 격파했다.
’비상시(非常時)에는 비상인(非常人)이 있어 비상한 공(功)을 세운다’-. 아마도 이들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위스턴 처칠은 또 이런 식으로 말했다. "전쟁은 모든 것의 순서를 바꾼다. 가치 기준마저 새로 설정케 한다."
전쟁은 비상사태다. 이런 비상시기에는 평화시에는 덕목으로 치부됐던 가치들이 때로 의미를 상실한다. 지도자의 자질도 그렇다. 친절하고, 예측가능한 행동에,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 이런 것들은 분명 바람직한 지도자의 자질이다. 전시에는 그러나 이 같은 성격은 우유부단으로 비쳐지기 쉽다. 모든 것이 혼미스럽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지도자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결단이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는 전시에 적합한 지도자인가’-. 2001년 9월11일. 미국이 테러전쟁에 돌입하게 된 그 날 이후 제기되고 있는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직 시기상조의 감은 있지만 그 대답은 일단은 ‘예스’다.
"링컨과 케네디 그리고 W 부시, 이들은 전혀 유사점이 없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된 줄로 묶여 있다. 허약한 지도자, 적법성이 결여된 모습의 대통령으로 출발했지만 국가가 위험에 봉착하자과감히 응전, 위기에서 나라를 건졌다. 위기를 맞아 진정한 지도자로 다시 태어난 게 그 공통점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데이빗 브로더가 내린 평가다. 그에 따르면 부시는 8개월전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대통령이 된 건 지난 20일 이었다는 것이다. 최후통첩 연설이 그를 지도자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는 표현이다.
말주변 없는 부시, 공개석상에 나서기 겁내는 부시 등 그를 따라 다니던 그동안의 평판을 일소에 붙인 게 이날의 연설로, 마치 링컨을 방불케 하는 명연설을 통해 ‘전시 지도자로 부시가 다시 탄생했다’는 게 부연의 평가다. 다른 정치 평론가들도 이런 평가에 인색치 않다. 한마디로 전쟁의 목표를 뚜렷이 밝히고, 국민을 응집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이다.
그러나 수사(修辭)는 수사일 뿐이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은 오히려 더 공허히 들린다. 연설의 수사로만 부시를 전시의 지도자로 치켜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면 왜 이 같이 좋은 점수를 받고 있을까.
비상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통령의 젓 조치는 주목을 받게 마련이다. 부시가 위기발생시 내린 첫 조치도 예외가 아니다. 그 조치는 워싱턴을 향해 날라오고 있던 피랍 민간 여객기에 대해 격추명령이다. 불발로 끝났지만 미국의 대통령이 자국민을 상대로 발포 명령을 내린 것은 남북전쟁시 링컨 이후 부시가 처음이다.
이 조치에 주목하면서 많은 관측통들은 전시 지도자로서 부시의 숨겨져 있던 면모를 새삼 발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테러공격 저지를 위해 자국민을 희생시킬 배짱이 있는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적에게는 어떤 공격을 가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포인트를 따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딕 체니, 도널드 럼스펠드, 콜린 파월 등 ‘빅 3’로 불리는 보좌팀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도 ‘전시 지도자 부시’의 이미지 제고에 일조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가지가 또 있다. 그 한가지를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부시가 보인 결연한 의지에는 수퍼 파워의 지도자가 보이기 쉬운 교만이 배제돼 있다. 그것은 겸손을 바탕으로 한 사명감의 발로인지 모른다." 그 겸손의 발로를 그는 기도하는 자세로 파악했다. 부시는 의회 연설에 앞서 종교지도자들과 기도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시며 그 어느때 보다 평안을 느끼고 있다."
’비상시에 비상한 지도자가 나서서 비상한 공을 세운다’-. 부시가 바로 그 비상한 전시 지도자인가. 아직은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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