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한국사회는 도처에 갈등과 투쟁의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다. 흡사 17세기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홉스가 갈파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
호남 대 영남, 여당 대 야당, 정권 대 언론, 정권 대 교육자, 정권 대 의사, 의사 대 약사, 기업주 대 노동자… 아무튼 상호 대칭을 이루는 집단마다 양보나 타협 없는 ‘대결구도’로 치닫고 있다.
홉스가 인류사회의 특징을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묘사했지만 그가 말하고자 한 핵심은 "그 투쟁을 넘어선 개인의 안전보장과 국가질서의 통합"이었다. 한데 300여년이 지나 21세기 문턱에 들어선 한국사회는 갈등과 투쟁 그리고 반목의 대결구도가 가속화될 뿐 통합의 기미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은 98년 취임사에서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선언한 바 있다. "다시는 이 땅에 정치보복이나 지역차별, 계층차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저는 지역간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국민화해와 통합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반이 흐른 지금, 영남지역에선 "경상도 문둥이 다 죽일 참이가?"하는 원성이 들끓고 있다. 야당은 DJ를 가리켜 "정치 보복의 화신"이라고 목청을 높이고 국사를 결정하는 국회는 여야 충돌로 영일이 없다.
DJ 스스로 "언론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내가 없었다"고 치켜세운 신문들이 정권과 "생사를 건 한판 승부"를 벼르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신문 대 방송, 신문 대 신문이 반정권 대 친정권으로 갈려 멱살잡이를 하고 있다.
정권과 의료계 그리고 의사 대 약사의 대결구도는 "의료 대란"을 몰아왔고 그 여진은 아직도 남아있다. 사업장은 어떤가.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신 노사문화가 열렸다"며 샴페인을 터뜨린 게 엊그젠데, 사업장마다 붉은 머리띠를 맨 노조의 시위가 다발로 일어나고 거리엔 화염병이 다시 등장했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런 대결구도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심화될 것이란 점이다. 보라, 어느 분야에서 화해와 양보를 통한 통합이 이뤄질 수 있겠는가. 지역 감정? DJ의 약속과는 달리 호남출신의 요직 차지와 지역경제 파탄에 울화가 치민 영남인들의 마음은 이미 정권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나갔다.
2003년 대통령 선거를 겨냥한 여·야당의 대결은 "죽느냐 사느냐"의 처절한 정쟁의 소용돌이에 이미 함몰됐다. 수천억원을 얻어맞은 신문들은 "오냐, 어디 보자. 정권이 막을 내리는 2003년 2월24일 자정, 그 때까지 목숨만 부지하자"하고 펜촉을 갈고 있다.
그런데 하나의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내치의 많은 분야가 이렇듯 험악한 대결상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화해의 찬가가 울려 퍼지고 있는 데가 한곳 있다. 다름 아닌 김대중 정권과 북한 김정일 정권간의 화해 분위기가 만발한 대북 정책 분야다.
금강산 관광을 계속하기 위해 국민 세금을 쓰는 관광진흥공사가 현대를 뒤 봐주기로 했고, 북한 배가 우리 북방 한계선을 버젓이 넘어와 항해해도 내쫓지 않았고, 탈북자들이 천신만고 끝에 남한 품에 넘어 와도 환영행사조차 하지 않는, "김정일 장군 심기 안 건드리기"에 정성을 다하는 듯한 당국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우선 우리 내부부터 손을 잡고 화해하고 발맞추어 나가도 민족간-국가간 무한경쟁이라는 21세기에서 살아남기가 지난한 시대를 맞고 있다. 하물며 내부가 갈등과 반목으로 들끓는다면 그 경쟁에서 낙오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가. 딱 한가지 길 밖에 없다. 최고 통치자가 대승적 위치에 서는 일이다. 지역차별이니 정치적 보복이니 언론탄압이니 하는 "오해를 살 일을 스스로 차단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구체적으로 김대통령은 민주당 총재직을 내놓고 오로지 국사에만 전념하는 게 옳다. 차기 정권 재창출과도 거리를 둬야 정쟁에서 발을 뺄 수 있다. 북한 교류는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가는 게 좋다. 호남인사를 가급적 요직에 앉히지 않는 실행적 자세를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 검찰을 정권과 유리시키는 결단, 이 또한 대결과 분열을 치유하는 좋은 처방이다.
DJ 정권의 임기는 1년 반쯤 남았다. 긴 시간이 아니다. 진정 마음을 비운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마음은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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