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퍼모델 제치고 색소결핍증 환자 찍는 릭 귀도티
파크 애비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열 세 살 가량의 소녀는 하얀 금발에 창백한 피부, 그리고 즐거운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하이패션 전문 사진작가로서 신디 크로퍼드나 클라우디아 쉬퍼, 케이트 모스 같은 수퍼모델들을 주로 찍어온 릭 귀도티는 그 소녀를 바라보며 떠올랐던 생각들을 기억한다. “저것이 아름다움이야. 생동감과 행복으로 넘치네. 저 소녀는 정말 매력적이군.”
그 소녀는 색소결핍증(albinism)이었다. 하얀 머리칼과 하얀 피부는 유전적인 이상에 의한 것으로, 귀도티도 알아챌 수 있었지만 색소결핍증 또는 백색증이라는 병명외에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 뒤로 4년동안 네 개의 대륙에서 수천통의 필름 작업을 한 다음인 지금, 귀도티는 색소결핍증을 비롯한 여러 유전적 이상으로 인한 질환의 전문가이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레블론’이나 ‘엘르’를 위한 사진은 찍지 않는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제 그가 촬영하는 것은 새로운 미의 기준을 정하는데 한 몫을 하게 될 ‘다름에의 찬양’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색소결핍증을 가진 사람이나 그밖의 유전질환을 가진 사람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 십대들에 관한 것이기도 하죠. 관용에 관한 것,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내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에 관한 거니까요.”
버스 정류장에서 그 소녀를 본 뒤, 귀도티는 의학 교과서에서 색소결핍증에 대해 찾아보았는데, 그것을 보고 매우 마음이 불편해졌다. 책에 수록된 사진들은 모두 속옷 차림의 어린이들이 진료실 벽을 배경으로 서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아주 부정적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겁먹은 듯 했고, 불행해 보였고, 사랑 받지 못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친구들과 웃고 있던 아름다운 소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귀도티는 런던이며 파리, 밀라노 등을 돌아다니며 광고나 ‘하퍼스 바자’, ‘엘르’ 같은 국제적인 패션 잡지에 실릴 수퍼모델의 사진을 찍는 자신의 화려한 직업이 주는 한계 속에서 조금씩 부딪쳐 나갔다. 자기 생각에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모델들을 다양한 제품을 위한 사진촬영에 기용하려 시도했는데, 먹히지가 않았다. “그것 때문에 고객들과 많은 문제가 생겼어요”
한편 의학책에서 자극받아 그는 좀더 연구하기 시작했고, ‘백색증 및 색소부족증을 위한 전국기구(NOAH)’를 알게 되었다. 대중문화에서 백색증은 대개 괴물이나 악마로 묘사되곤 했으므로 이 단체도 처음엔 그의 접근을 경계했으나, 곧 그는 자신의 뉴욕 스튜디오에서 사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결과 ‘라이프’지 1998년 6월호에 다섯 페이지에 걸친 화보를 실었는데, 제목이 ‘아름다움의 새로운 정의’였다.
이 경험은 그의 삶과 일을 바꿔놓았다. 더 이상 전에 찍던 것과 같은 사진을 찍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 푹 빠지게 된 거죠. 전에 해온 일은 모두 이 일을 위한 훈련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는 첫 번째 작업의 피사체중 한 명이었던 어느 10대 소녀를 기억한다. 그녀는 심한 놀림을 받아왔기 때문에 자신감이 없고 위축되어 있었다. 그는 고급 패션 모델들을 찍을 때와 같이 조명을 켜고 신나는 음악을 틀고는 외쳤다. “너는 아름다워. 웃어봐. 너 자신을 보라구. 멋있잖아!” 그리고 그는 그 소녀가 자신의 렌즈 안에서 피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느 순간, 그 여자애가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걸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애는 삶의 무기를 얻었던 겁니다. 자신감이라고 하는 무기 말입니다”
‘라이프’지의 화보는 귀도티를 옛 룸메이트 다이앤 맥클린과 다시 연결시켜 주었다. 그녀는 코넬 의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의 작품을 보고 그가 한 가지를 놓치고 있음을 지적해 주었다. 바로 작품 속 인물들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프로젝트의 두 번째 단계를 시작했다. 미국 전역과 남태평양, 뉴질랜드 등지를 돌며 귀도티는 사진을 찍고 맥클린은 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터뷰를 테이프에 담았다. 프로젝트의 비용은 유전병 연맹을 비롯한 여러 기관의 후원과 귀도티 자신의 돈으로 충당했다.
귀도티와 맥클린은 이 프로젝트가 자기들이 사진 찍었던 곳에서의 순회 전시로 이어졌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 의과대학에서 교육적인 용도로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이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정의하도록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자신의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뉴저지주 사우스 햄프튼의 랜디 스튜어트(18)에게 귀도티의 작품에 등장한 것은 바로 그런 기회가 되었다. 외모 때문에 놀림받고 싸우며 살아온 그가 이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친구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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