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그 해에는 북한 간첩선이 유난히도 자주 동해안에 침투했었다. 망망한 바다에서 간첩선을 발견하고 격침시킨다는 것은 서울 운동장에 동전을 던져 놓고 그 동전을 찾아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처럼 발견과 격침이 어려운 만큼 거기에 얽힌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 중 한가지를 소개하려 한다.
당시 필자는 육군 준장으로 국방부 대변인을 하고 있었다. 초여름 어느 토요일 막 퇴근하려는데 외무부에서 전화가 왔다. “동해안에서 우리 해군이 일장기를 단 일본 어선들에 향해서 무자비하게 발포한데 대하여 야마구치 지역 어민들이 한국정부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요구하며 극렬하게 데모를 하고 있고 일본정부도 한국정부에 강력히 항의할 움직임이 보인다. 따라서 이 사태수습을 위해서 국방부가 적절한 해명과 유감의 성명을 발표해 주기 바란다”라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나는 “그같은 상황을 합참본부장은 물론 국방장관으로부터 지시 받은 바 없다. 외무부가 상급기관도 아니면서 한마디 상의나 상세한 정보제공도 없이 마치 하급기관에 지시하듯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적성국가도 아닌 외국을 향해 성명을 국방부가 직접 발표하는 것은 외교상 부드럽지 못하다.
국방부가 한다면 경고나 선전포고를 하지 사과나 유감 따위는 군 창설 목적이나 군인체질상 맞지 않는다. 더욱이 국민들에게 국방부가 허약하게 보인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외국을 상대로 하는 주무부서인 외무부가 유연한 솜씨로 해결하기 바란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끝냈다.
그런데 좀 있으니까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외무부와 같은 내용의 전화를 해왔다. 알고 보니 외무부에서 국방부가 말을 듣지 않으니 청와대에서 압력을 가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단호하게 “대통령의 지시냐? 아니면 못한다. 만일 국방부가 성명서를 임의로 작성해서 발표했다가 한·일 관계에 큰 문제가 생기면 당신이 책임질 것인가? 확답을 해달라. 책임을 지지 못한다면 그만두자”라고 말했다.
그 다음에는 문공부에서 그 다음에는 중앙 정보부에서 집중 설득공세를 펴왔다. 도대체 이 핑퐁공이 어디까지 가는가 하고 보았더니 청와대 수석이 국방장관에게 보냄으로써 결국 나에게 떨어지고 말았다. ‘책임전가에 능숙한 관료 네 사람이 고지식한 군인 한 사람에게 떠넘기고 골프 치며 희희낙락하겠지, 청와대 말이라면 오금도 못 펴는 장관, 한 마디 지침도 주지 않고 알아서 하라며 골프장으로 직행하고, 공(功)은 상관에게 책임은 부하에게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 한국군의 악습을 한 두 번 겪어봤나.....’
속상하지만 긴박한지라 더이상 상념에 잠겨 있을 수 없었다. ‘인일시지분 면백일지우’(忍一詩之憤 冕百日之憂)라 분함을 일시 참으면 근심을 백일 면한다라는 말을 되새기며 참았다.
문제해결의 핵심은 일본어선이 아니라 우리 해군장병들이 앞으로 대간첩작전 임무를 수행함에 지장을 초래케 하거나 위축되는 일이 없도록 성명서의 내용을 작성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취지를 전제로 해서 발표문의 골격을 짰다.
첫째 한국 해군의 사기와 위신을 위해 사과할 수 없다.
둘째 북한 간첩선이 일장기를 달고 항해하기 때문에 한국의 작전해역 내에서는 한국 해군의 정선명령에 응해야 한다.
셋째 앞으로도 정선명령에 응하지 않으면 북한 간첩선으로 간주하여 발포한다.
넷째 정선명령은 국제규약이므로 한국해군의 행위는 정당한 것이다.
다섯째 한국해군이 일본어선의 항진 방향에 안전거리를 고려해서 위협사격을 가한 것이지 배를 표적으로 사격한 것은 아니다.
이상과 같이 5가지 골자로 대일 성명을 발표했다.
발표에 앞서 일본 자위대 공군대령 후지하라 무관이 나를 찾아왔기에 대간첩 작전의 성패는 우리의 생존권과 직결된다는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납득시켜 보냈다. 단호하고 강경한 내용의 성명이 나간 후 일본정부나 언론이 더 이상 문제삼지 않고 조용히 끝났다. 그리고 우리 해군장병들이 윗분으로부터 처벌받지나 않을까 하고 잔뜩 움츠려 있다가 전파를 타고 “...앞으로도....발포한다”라는 말이 강하게 나가자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며 미 CBS 서울지국장이 나에게 전해주었다.
최근 며칠사이에 북한상선(?) 여러 척이 쏠 테면 쏴 봐라는 식의 배짱으로 아주 약을 올리며 당당하게 우리나라 영해를 자기네 앞마당처럼 왔다갔다하며 침범했다. 이에 대한 우리해군의 대응조치가 너무 소극적이었다며 국회에서 언론에서 맹비난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국군장병들의 심정과 입장을 이해해 주어야하며, 오히려 그 근원적인 책임은 정치권에 있음을 자인해야 한다.
사회학자들의 이론을 빌리면 인간의 모든 사회적 행동은 가치와 규범과 수단으로 층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3가지 개념의 박자가 잘 맞아 떨어져야 갈등과 지혜를 감소시켜 발전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개인은 미치광이가 되고 국가는 망한다는 것이다. 즉 상위개념의 가치는 적장과 손을 잡고 햇볕정책, 중위개념의 규범은 주적이 없는 대전규정, 하위개념의 수단은 최신예 무기와 엄청난 파괴력의 증강 등 3가지 층화된 개념이 서로 맞지 않는 불적응 현상은 최 일선 장병들이 일일이 계통을 통해 청와대까지 물어보고 전투행위를 해야하니 얼마나 지체와 갈등을 가져오겠는가 말이다. 더구나 계선상에 주요책임자가 골프 때문에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상상도 어렵다. 아무튼 국가존망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3가지 개념을 정치권에서 우선적으로 조속히 조정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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