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0월 3일 공교롭게 한국의 개천절이기도 한 이날 독일 국민들은 역사적인 통일의 위업을 이룩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불과 1년도 안 돼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제2차 대전후 40여년간 분단되어 온 동서독 통일의 기폭제는 동독인의 서방 탈출이었다. 1989년 수만명의 동독인들이 직접 서독으로 가지 못하자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등을 통해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당시 서독 정부는 이웃나라에 적극적인 로비를 해 이들이 무사히 넘어 올 수 있게 최대한 성의를 보였다. 자국민들의 서방 탈출을 막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동독 정부는 베를린 장벽 붕괴를 사실상 허용했고 그와 함께 공산정권이 무너지면서 통일이 이뤄진 것이다.
지금 탈북자들의 상황이 당시 독일과 너무나 유사하다. 동독인들이 제3국을 경유해 서독으로 넘어간 것처럼 중국과 몽고를 거쳐 한국으로 가려는 탈북자들의 발걸음이 줄을 잇고 있다. 한가지 다른 것은 이들을 대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다. 이들을 적극적으로 껴안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이 도움을 청해도 북한 눈치나 보면서 못 본 체 하기가 일쑤다. 이번 장길수 일가족 농성사건만 해도 외신보도에 따르면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 사무실에서 한국 정부에게 신병을 인도하려 했으나 북경 주재 한국 대사관이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은 탈북자 문제 해결에 획기적인 전기가 될 전망이다. 과거에도 간혹 탈북자 문제가 외국 언론에 보도된 적은 있지만 이처럼 전 세계 미디어의 집중조명을 받은 적은 없었다. 한국, 일본, 중국등 아시아 지역은 물론 AP, 로이터등 통신사와 미국과 유럽의 주요 언론이 거의 빠짐 없이 큰 뉴스로 다뤘다. 그 바람에 탈북자의 참상과 중국 정부의 비인도적인 처사가 만천하에 공개되게 됐다.
이번 사건은 중국 정부가 자초한 것이다. 중국은 해마다 1989년 6월 있었던 천안문 학살 기념일을 전후해 반체제 인사와 탈북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해 왔는데 올해는 유독 정도가 심했다. 지난 6월 중순에는 북한 정치보위부 인사 20여명이 연길에 있는 대형 한인교회에 난입, 교인들을 구타하고 간증중이던 꽃제비(탈북 아동)들을 체포해 간 일도 있었다.
길수 일가족이 유엔 판무관 사무실에 뛰어 들어간 것도 이런 인권 유린 사태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문제 처리를 놓고 고심하던 중국 정부는 이들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있지도 않은 ‘건강 문제 치료차’라는 구실로 이들을 제3국으로 보냈다. 이번 결정을 내린 것은 강택민을 비롯한 중국 최고위층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중국 정부가 이 문제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가 보여주는 대목이다.
비록 길수 일가족이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탈북자에 대한 중국 당국의 태도가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오는 2008년 올림픽 주최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세계 언론들은 이번 사건을 보도하면서 이 사실을 빠뜨리지 않고 언급했다. 중국의 인권 탄압이 계속 이슈가 될 경우 올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IOC회의에서 올림픽 주최국으로 지정되기 힘들다는 것을 중국 정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또 하나는 탈북자들이 보호받기 위해서는 문제를 일으키면 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앞으로 북경의 외국 회사나 관공서로 몰려가 농성을 하거나 천안문 광장에서 분신 자살을 기도하는등 극한적 행동을 취하는 탈북자들이 계속 나올 것이다. 이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중국 정부는 탈북자들에 대한 탄압을 삼갈 것이다.
길수 사건이 이처럼 전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다까야마 히데꼬 뉴스위크 도쿄지국장과 이시바루 지로 사진기자, 이영화 간사이대 교수등의 공이 컸다. 특히 12년 전부터 북한 기아와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갖고 보도해 온 다까야마는 이번 일의 성사는 물론 이 사건이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치밀한 계획을 짜는데 앞장섰다.
북한과는 별 상관도 없는 일본인들이 이처럼 정성을 보이는데 한국 정부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통일에는 전혀 마음이 없는 김정일과 만나 봐야 이용만 당할 뿐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 기아와 추방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탈북자들을 위해 문을 활짝 여는 것은 인도적 관점에서 당연히 해야할 일일뿐 아니라 북한 독재정권의 붕괴와 통일을 앞당기는 지름길임을 한국 정부는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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