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원화를 포기하고 미국 달러화를 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한국과 미국을 오갈 때 돈을 바꾸는 번거로움이 없어진다. 뉴욕에 살고 있는 한인들로선 이곳에서 번 돈을 그대로 한국에 저축하거나 투자할 수 있다. 환율 변동에 의해 손해볼 위험도 사라지지만, 거꾸로 환차익을 얻을 기회도 잃게 된다. 그렇다면 국제화시대에 한국도 세계 기준 통화인 달러를 쓸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고 한번쯤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한국의 달러 사용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 앞서, 느닷없이 이 주제를 들고 나온 이유부터 짚고 넘어가자. 미국 경제학계에서 성장론의 대가로 알려진 로버트 배로 하버드대 교수는 경제전문 비즈니스 위크지의 컬럼을 통해 한국이 외환위기를 피하려면 자국 통화를 버리고, 달러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지난 6월11일자 컬럼에서 스스로 ‘양키 제국주의자(Yankee Imperialist)’임을 인정하면서 “한국은 미국과 밀접한 교역 관계에 있고 미국과 자유로운 교역을 위해서는 달러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기자는 배로 교수의 제안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기자는 지난해 한국에서 ‘월스트리트 제국주의’라는 책을 출판했었다. 뉴욕에서 한국 외환위기를 목격하면서 미국 금융시장의 엄청난 영향력을 느끼고 글로벌리제이션은 뉴욕 월가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렇지만 달러를 한국의 통화로 써야 한다는 주장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 이유를 들어보겠다.
첫째, 통화는 주권을 기초단위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이 원화를 포기하고 달러를 쓴다면 주권을 잃는 것과 다름없다.
현재 달러를 자국 통화로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파나마,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등 중남미 중소국이며 아르헨티나도 2년전에 달러 사용을 검토한 적이 있다. 그러면 이들 국가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지난 88년 미국이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를 체포하기 위해 달러 공급을 중단한 적이 있다. 당시 파나마는 달러가 부족해 낡고 더러운 지폐가 통용되고 극심한 불황을 겪어야 했다. 달러를 사용하는 나라는 중앙은행이 필요없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금리를 올리거나 내리면 그대로 따라해야 한다. 국가의 거시경제정책은 실종하고 미국의 금융정책이 가는대로, 국제외환시장에서 달러 가격이 변하는대로, 그저 순응해야 한다.
둘째, 배로 교수의 주장과 달리 한국이 달러를 사용하면 또 다른 경제위기를 맞을 수 있다. 지난 97~98년의 외환위기는 한국 정부가 원화를 달러에 고정시켰기 때문에 발생했다. 한국 경제는 일본과 경쟁을 해야 하는데 엔화가 하락하는데도 원화가 달러에 매여있었기 때문에 한국 제품의 수출경쟁력은 떨어지고 무역적자가 가중되었으며 기업들이 무더기로 도산하게 됐던 것이다. 한국이 달러를 쓰게 되면 한국 기업들은 일본과 중국, 아시아 국가와의 경쟁에서 패해 쓰러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셋째, 한국에 달러가 통용되면 미국은 한국에 지폐를 공급한 대가로 상당한 이익을 챙기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지갑 속에 넣고 다니는 초록색의 달러 지폐(그린백)는 미국 재무부가 이자를 지불하지 않고 찍어내는 일종의 유가증권이다. 미국은 조폐창에서 45센트의 비용으로 100달러 지폐 한장을 찍어 같은 금액의 한국산 카메라와 교환할 수 있다.
한국과 경제규모가 비슷한 아르헨티나가 지난 99년에 달러를 통용하기 위해 미국과 협상한 적이 있다. 그때 아르헨티나에 통용되는 페소화를 모두 달러로 바꿀 때 160억달러의 지폐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연간금리 5%로 할 때 미국은 아르헨티나에 지폐를 공급한 대가로 8억달러의 이자를 절감하는 효과를 얻게 된다. 미국은 종이돈을 찍어 공급한 대가로 한국에서 10억달러 정도의 상품을 거져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배로 교수는 컬럼 끝머리에서 “한발 양보해서 양키 제국주의는 최선의 제국주의 형태”라고 단정했다. 한국이 미국식 자본주의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제국주의를 받아들이라는 말엔 공감하기 어렵다. 일제 식민지시절에 일본은행권을 써야 했던 쓰라린 역사가 기억되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의 머리속에 있는 양키 제국주의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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