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극장에 간 부모의 심정은 대부분 비슷하다. “얘들보는 동안 잠이나 자자.” 하지만 올 여름은 이럴 필요가 없다.
애니메이션 ‘슈렉’이나 가족극 ‘스파이 키드’는 허황한 돈잔치 블록버스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만족스런 오락 영화다.
두 영화가 ‘애들 영화’ 이상의 수준에 도달한 것은 최근 수 년 간 전세계 문화의 코드가 된 ‘엽기’, ‘패러디’가 풍부한 자금력과 만났기 때문이다.
언더그라운드 문화,혹은 사소한 일에도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하는 일부 지식인의 취향과 잘 맞아 떨어졌던 ‘엽기’는 상투적이고, 정형화하기 쉬운 블록버스터가 ‘작품적’ 의미를 갖게 하는 데 결정적인 촉매가 됐다. 무엇이든 먹어서 ‘할리우드식’으로 되새김질하는 할리우드의 속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엽기적인 그대, 슈렉
“옛날에 아름다운 공주가 살고 있었다. 공주의 얼굴은 눈처럼 고왔으며, 입술은…’으로 시작하는 동화책을 쭉 찢어 화장지로 사용하는 슈렉.
영화는 동화 관습을 뒤집는 데서 출발한다. ‘슈렉(Shrek)’은 못생긴 초록 괴물 슈렉이 파콰드 영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성에서 공주를 구해오는 이야기.
파콰드 영주가 동화 속 인형을 잡아들이는 대목부터 ‘패러디’행진. 코가 늘어나는 피노키오는 ‘엽기 인형’으로 분류되어 철창에 갇히고, 파콰드 영주가 신부감을 고르는 장면은 ‘사랑의 스튜디오’를 연상케 한다.
슈렉이 구하러 오자 소란에 잠을 깬 공주는 ‘백마 탄 왕자님’의 키스를 받기 위해 일부러 자는 척한다.
‘매트릭스’ ‘글라디에이터’‘라이온 킹’’미녀와 야수’ 등 그간 영화에서 본 재미있는 장면은 모조리 패러디했다.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슈렉과 영주의 싸움이 벌어지면 영주측 병사는 ‘박수’ ‘야유’등이 쓰인 팻말을 치켜 들고 반응을 유도한다. TV쇼의 바람잡이다.
패러디로 워밍업한 유머 넘치는 분위기는 엽기적 발상으로 폭소가 된다. 낮에는 아리따운 공주, 밤에는 ‘뚱녀’가 되는 마술에 걸린 공주의 취미는 개구리의 꽁무니에 바람을 넣어 풍선 만들기.
이 외에도 뱀에 바람을 넣어 길다란 막대 풍선을 만드는 특기도 있다. 벌레가 덕지덕지 붙은 거미줄을 돌돌 말아 솜사탕을 만들어 준 슈렉에 대한감사의 표시다. 진흙탕으로 목욕하기, 귀지로 초 만들기는 슈렉의 습관이자 취미.
그러나 역시 엽기와 패러디는 ‘마이너’영화의 소재. ‘슈렉’은 영화의 구체적 부분은 철저히 마이너 문화의 코드를 이용했지만 전체 구도는 충분히 관습적이다.
외딴 곳에 사는 누더기 영웅, 그를돕는 영웅의 친구(‘슈렉’에서는 날아다니는 당나귀 덩키), 영웅과 공주의 사랑, 미묘한 감정이 싹틀 때쯤 생기는 사소한 오해와 결별, 그리고 영원한 사랑과 행복. 영화는 동화를 뭉개버리는 척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동화를 만들어 낸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의 키스를 받으면 마법이 풀린다’는 공주가 키스 후 ‘의외의’ 변신을 하는 모습이 참신하다. 해피 엔딩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법이 풀려 평생 뚱녀로 지내게 된 공주를 보고 슈렉이 줄행랑을 쳤다’는 식으로 결말을 낸다면,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도 우울해졌을지 모른다. (너무 사실적이라서?)
‘유쾌한 조롱’을 뒷받침하는 것은 스토리와 기술력. 카메론 디아즈를 본뜬 피오나, 마이크 마이어스를 모델로 한 슈렉, 에디 머피의 눈매가 그대로 살아있는 덩키 등 실제 유명 배우의 이미지가 애니메이션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게 한다.
이들 배우들이 목소리를 먼저 녹음한 후 만화를 그려 넣어 말과 입모양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것도 기가 막히다.
미국서는 5월 18일 개봉, 6주 간 2억 1,000만 달러(약 2,700억원)를 벌어 들여 제작사는 입이 찢어졌다. 7일개봉. 어린이를 위한 우리말 더빙판도 상영된다.
‘스파이 키드’-인질로 잡힌 부모 구출작전…
아마 ‘슈렉’만 아니었더라면 올 여름 엽기발랄 1순위에 올랐을 영화. ‘나홀로 집에’ 이후 어린이 영화는 침체일로였다.
비슷한 베끼기영화 아니면 가족주의에 함몰된 나머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스파이 키드(Spy Kids)’는 적국 스파이 출신의 부모(안토니오 반데라스, 칼라구기노)를 둔 카르멘(엘렉사 베가)과 주니(대릴 사바라) 남매가 인질로 잡힌 부모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린 어린이 액션 어드벤처.
팀 버튼이 ‘가위 손’이나 ‘배트맨’에서 보인 독특한 공간 미학은 감탄의 대상이었다. B급 영화로 훈련된 자유로운 상상력이 거대한 자본과만나 꽃을 피운 경우다.
‘엘 마리아치’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로베르토 로드리게스 감독 역시 ‘스파이 키드’에서 B급 정서를 화려한 시각적 효과로풀어냈다.
스페인 건축 거장 안토니오 가우디를 남미식으로 변주한 공간은 마치 책장을 넘기면 생각치도 못한 이미지들이 입체적으로 튀어나오는 동화책같다.
머리, 팔, 다리가 모두 엄지손가락으로 구성된 ‘엄지엄지(Thumb-Thumb)’, 유전자 변형을 통해 만든 다면체 괴물 ‘푸글리’는 ‘디지몬’의새로운 엽기 버전이다.
전자레인지에 넣고 1분만 돌리면 햄버거세트가 쟁반에 예쁘게 받쳐져 나오고, ‘삐리삐리 쿠쿠쿠’하는 푸글리의 말을 거꾸로 돌리면 ‘풀룹은 미쳤다 구해줘’식이다.
스파이들의 비장의 무기가 생산되는 곳은 작은 가게로 이곳에서는 ‘스타워즈’의 레이저봉 따위는 소품에 불과하다. 입으면 날게 되는 조끼, 맞으면 기절하는 기절껌 등.
어린이 오락쇼의 인기 사회자인 플룹(알란 커밍)이 이런 괴물과 세계 지도자의 자녀의 복제 로봇을 만든 것은 세상을 지배하려는 음모 때문이다.
게임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숨어든 사악한 권력욕과 지배 체제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래도 가족이 소중하다’는 상투적인 메시지는 여전하지만 부모,자식이 함께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가족 영화. 미국에서 3월 말 개봉 3주간 박스오피스 1위. 14일 개봉.
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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