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젊은 여성들이 애인이나 가까운 남자 친구,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경우를 수시로 접한다. 오빠 호칭이 한국에서는 널리 사용돼왔지만 뉴욕 한인 사회에서까지 이같은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한국에서 뉴욕으로 관광, 유학, 이민온 젊은이들이 많고 한인 뉴요커들 역시 모국 방문 기회가 잦다 보니 자연히 호칭 모방이 이루어졌으리라 짐작된다.
젊은 여자들이 보통 사이 이상의 남자 선배나 연인 등을 두고 부르는 말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왔다. 지난 70년대는 주로 ‘자기’란 단어가 많이 쓰여졌다. ‘자기’는 여자가 남자를 부를 때 뿐 아니라 남자도 함께 애용했다. 80년대에는 ‘자기’가 ‘형’으로 바뀌었다. 친밀하지는 않지만 상대를 높여 부를 때 남자들끼리 사용하는 김형, 이형, 박형하는 접미사 형식이 아닌, ‘형’이란 단순 일음절 단어로 대체했다. 그러다 90년대 이후 ‘오빠’가 ‘형’을 밀어내고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호칭은 인간사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처음 만난 사이에는 풀네임 뒤에 씨를 붙이는 게 일반적이다. 이후 어느정도 편안한 사이가 되면 동년배 경우 이름을 부르게 된다. 관계가 보다 밀접해지면 별명이나 ‘어이’ 혹은 ‘야’라는 호칭 명사가 대신한다. 이처럼 호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소감(親疎感)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상대방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존경심이 배어 있는지 아니면 깔보고 있는지 여부도 알 수가 있다.
여자가 남자 연인을(물론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지만) 어떻게 지칭하는지, 또 그 지칭이 일반화, 고정화한 현실은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본다. 그러나 사회현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어서 ‘자기’-’형’-’오빠’로 바뀐 원인과 이유를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는 식견이 내겐 없다. 또한 과문한 탓인지 이 분야 관련 연구논문 등도 발견하지 못했다. 때문에 시대에 따라 호칭이 바뀌게 된 원인을 어거지일지 모르나 나름대로 한번 분석해보았다.
70년대 한국 사회를 지배한 이슈는 경제성장이었다. 국민총생산이 얼마며 수출액수가 전년대비 몇 퍼센트 올랐다는 게 가장 큰 관심사로 취급됐다. 또한 일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랭킹 몇위라는 식의 기사가 중요하게 다뤄졌다.
사람들은 가진 게 별로 없으면 재산에 대한 집착이 그렇게 심하지 않다. 반면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하면 소유욕이 더욱 늘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히 끼리끼리 문화가 발달하고 심성도 자기 중심적이 된다. ‘자기’는 자기 중심적, 소유욕, 이기심 등이 위력을 발휘하는 사회 분위기에 염색된 호칭이다.
반면 80년대는 민주화 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군사 정권이 계속되긴 했지만 독재의 정도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보다 약화했다. 젊은이들은 각종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여학생 역시 남자 못지 않게 열정을 갖고 여기에 합류했다. MT 등을 통해 생겨난 동지 의식이 남자를 ‘형’으로 부르게 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비운동권 여성들에게도 전파돼 ‘형’이란 호칭이 일반화한 것으로 보인다.
90년대는 민주화가 웬만큼 이루어진 시대였다. 사회가 보다 민주, 개방화하면서 성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여자들의 성의식 역시 많이 진보, 개방적으로 변하면서 프리섹스를 주창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형제간의 호칭인 ‘오빠’가 이성간에 통용되는 것은 성문화의 비건전성을 표출하는 또 다른 현상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오빠’란 호칭을 두고 비건전성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긍정적인 사회 현상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오빠’는 또 다른 의미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의미를 안고 있다. 여성은 이 호칭을 통해 남성에게서 친오빠와 같은 편안함을 기대하는지 모른다. 마음껏 어리광부릴 수 있는 동생으로 취급당하면서, 보호를 동반한 사랑을 원하는 잠재의식의 발로가 ‘오빠’ 속에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이는 서로가 대등한 입장에서 존중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현대 사회의 남녀 관계와는 배치된다. 한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인 뉴요커들만은 퇴행적인 호칭 문화에서 벗어나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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