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곁에 계실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만 해도 모처럼의 오랜 통화에서 빨리 회복되셔서 이곳에 한번 다녀가시라고 했더니 “엄마랑 의논해서 한번 가마” 하셨는데 그것이 마지막 말씀이 될 줄이야…
평남 용강 부농의 외아들로 태어나 7살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셨고 결혼을 위해 고향에 돌아올 때까지 유복한 청소년기를 보내셨지만 맏딸인 나를 낳자마자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시작된 피난살이는 다른 실향민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가난과 역경의 힘든 생활이었다.
남달리 부지런하고 교육열이 높으셨던 아버지께서 적은 국영기업체 공무원 월급으로 우리 6남매를 공부시키느라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셨는가를 기억해보면 지금도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퇴근길에는 항상 생과자나 찹쌀 떡등 간식거리를 들고 오셨고 6남매 생일을 꼭 기억해서 스끼야끼 뿐인 식탁에라도 아이들을 둘러 앉히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셨다. 생일날 선물로 받았던 강소천 동화집, 피터 팬등 동화책들은 어렸을 때의 나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이발, 목욕비 밖에 안 쓰시고 세 정거장 걸어서 출퇴근하며 아끼신 전차표 값 몽땅을 내 지갑에 용돈으로 채워 넣어 주셨기에 나는 친구들과 하교 길에 늘 빵집에 들릴 수 있었고 예쁜 손수건등 사고 싶은 것을 마음놓고 살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보너스를 타신 날은 예외 없이 문방구로 데리고 가서 일년동안 쓸 공책과 연필등 온갖 학용품을 사 주실 뿐 아니라 노트마다 일일이 학년, 반, 이름을 미리미리 다 써 주시는 자상한 분이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시간이 좀 나면 문방구에 들려서 필요한 것들을 챙기는 것을 즐긴다. 색색 나일론 장갑이 새로 나오면 제일 먼저 딸의 손에 끼워야 했고 테니스라켓이나 스케이트가 귀하던 시절이었는데도 예약금을 맡겨서라도 구입하여 뭐든지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고 노력하셨다.
6학년 때는 부자집 애들 몇 명밖에 할 수 없었던 과외공부에 무리를 해서 집어넣고는 끝나는 시간인 밤 10시에는 꼭꼭 데리러 오셔서 추운 밤 군밤을 사먹으며 아버지와 돌아오던 일이 그립기만 하다.
학교에 다녀오면 복습과 숙제를 늘 돌봐 주셨고 시시때때로 학교에 들려 담임 선생님을 만나시고 만국기가 휘날리는 가을운동회 때는 육성회장으로 본부석에 앉으셔서 선생님들과 모든 진행을 맡아 하시고 학부형 달리기에서는 항상 1등을 하시는 젊고 씩씩한 아버지가 어린 내게는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하도 학교에 열심이시라 어머니는 아예 나설 필요조차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시절, 식목일마다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국민들에게 공개했는데 마침 그 날이 내 생일이라 아버지께서는 나의 친구들을 모두 데려오게 해서 경무대 안뜰을 구경시키셨고 4.19가 터진 날에는 이기붕씨 집 근처인 우리 학교가 위험하다고 득달같이 달려오셔서 나와 친구들을 빼내어 불타는 서울역 앞을 지나 영등포까지 걸어서 데려가셨기에 지금도 우리 친구들은 “그 유별났던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다.
자식들에게 받을 줄은 모르고 주는 데만 만족하셨던 아버지.....그것이 자신의 삶의 기쁨이셨겠지 하고 생각하면 조금은 위로가 되곤 한다.
튼튼한 몸과 강한 정신력을 내게 물려 주셨을 뿐 아니라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는 공급원이셨던 아버지! 인생의 마지막 투병 길에서 그 맏딸의 다정한 수발 한번 못 받아보시고 청소년기를 보낸 동경을 한번 가보고 싶은 소원을 못 이루시고 외롭게 떠나가신 게 너무나 가슴 아플 뿐이다. 그 사랑하시던 자녀들과 손주들을 두고 어떻게 가셨는지....
생각해보면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이곳에 모셔야겠다는 다짐을 늘 해오면서도 “오실 수 없는 때가 온다”는 생각을 왜 그리 못했는지 기가 찰 뿐이다.
그렇게도 건강하시던 분이 당뇨합병증으로 누워 계신 몇년동안 가 뵙지도 못하다가 세상 떠나시기 석 달 전 여름방학에 25살짜리 우리 딸과 서울에 가서 한 달을 같이 지내고 돌아오는 길, 지팡이에 의지해 따라나오시며 떠나는 자동차에 매달려 못 가게 하셔서 우리 모녀는 다시 내려 아버님과 대문 앞에서 셋이 엉켜 실컷 울다가 참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돌아선 게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이 되었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안 계시다는 게 아직도 실감은 안 나지만 젊은 날에 다니시던 교회생활을 중단하신 지 수십년, 어머니와 우리들을 안타깝게 하셨으나 투병중에 하나님께로 돌아와 천국가신 확신을 우리들 모두에게 주신 데 감사한다. 아버지, 천국 가서 다시 만나 뵐 때까지 편히 쉬세요. 참으로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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