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에 대한 난민지위 부여를 유엔에 탄원하기 위해 최근 미국을 방문한 탈북자동지회 여성부 회장 장인숙씨를 만나 탈북자의 현주소에 대해 들어봤다. 장씨는 망명신청중인 김순희 여인과도 만나 탈북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모녀 인연을 맺기도 했다.
-탈북자동지회는 어떻게 시작되고 무슨 일을 하고있나.▲98년 12월 탈북 여성들이 모여 진달래회를 구성했다. 진달래는 북한의 국화다. 한달 뒤인 99년1월 황장엽 선생 주도로 탈북자동지회가 설립된 후 진달래회가 탈북자동지회 여성부가 됐다. 탈북자의 국내 정착과 해외 탈북자를 돕는 일을 한다. 한국에 정착한 우리들은 임대 아파트나 정착금 혜택을 받고 있지만 중국, 베트남, 몽골등 해외에 있는 탈북자들은 어려운 처지에서 고생하고 있다.
-이번에 유엔에다 탈북자 난민지위 청원을 위한 서명을 전달하기 위해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했는데 유엔에서는 누구를 만났는가.▲사무총장이 외유중이라 보좌관을 대신 만났다. 미국무부 관계자들도 만나 탈북자 망명 허용에 관해 부탁했다. 유엔측은 최선을 다하겠지만 당장에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중국의 태도가 관건인데 북한의 오랜 우방인 중국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이 탈북자를 송환만은 하지 말아주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다.
-최근 들어 북한측 태도가 완화됐다는 말이 들리는데.▲맞다. 전에는 중국국경만 넘어 갔다가만 와도 민족반역자라는 이름으로 처단했는데 지금은 그 형편에 따라 처벌을 내리고 있다. 제일 약한 경우는 10일 동안 공부를 시켜서 내보내고 보통 강제노역에 처해진다. 성경책을 가지고 있거나 중국에서 한국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눈 사실이 밝혀지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진다.
-외국여행은 자유롭게 할 수 있는가.▲이번이 처음이다. 유엔 파견 대표단의 일원이기 때문에 쉽게 여권을 발급받았지만 정착 후 2년 정도 지나야 중국 정도 갈 수 있는데 그것도 단수여권이다. 미국, 일본 같은 곳은 환갑을 지난 사람이 혈육을 만나러 갈 경우에만 여권을 내주는데 그것도 까다롭다. 일반관광은 생각도 할 수 없다.
-국내 활동에는 지장이 없는가.
▲탈북자가 수용소에서 나오면 일정기간 일대일로 경찰관이 따라 붙는다. 처음 2년에서 1년으로 줄었다가 지금은 8개월이다. 정착을 돕는다는 명목이지만 감시 역할도 병행한다. 그러나 탈북자가 늘면서 경찰력이 부족해지다 보니 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에서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전 가족에 일대일로 따라 붙던 것이 가족당 한 명으로 바뀌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다가 한국에 와서 적응하는데 힘든 점이 많지 않은가.▲가장 참기 힘든 것은 괴로움과 외로움이다. 북한의 형제자매들이 나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당할 것인가 항상 죄의식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괴롭고 학연,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치는 한국사회 속에서 의지할 곳 없기 때문에 외롭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 신앙에 의지하게 됐다. 신앙은 나에게 제2의 탈출인 셈이다.
-현재 북한의 실상은 어떠한가.▲굶어 죽는 문제는 전보다 양호해졌다. 96년도와 97년도에 왜 그리 많이 죽었는가 하면 배급이 갑자기 끊기니까 사람들이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면역도 되고 해외 식량원조에 의해 배급도 일부 이뤄지니까 요즘엔 굶어죽는 사람이 많지 않다.
-탈북자는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는가.▲그렇다. 94년도까지 한자리 숫자, 95~98년 두자리 숫자였다가, 그 이후 연 100명이 넘고 있다. 올해에는 두 달 동안 86명이 넘어 왔다고 하는데 연말까지 1000명 가까울 것으로 본다.
-이로 인해 체제가 위협받을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김정일이가 중국에 가서 탈북자를 빨리 송환해 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봐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개미구멍이 제방을 무너뜨린다는 옛말처럼 한알 두알 모래알처럼 빠지는 탈북자가 체제 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북에 있을 때 한국의 실상은 잘 알았나▲장기수 이인모가 송환돼 왔을 때 평양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승리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34년간 감옥생활하고 44년만에 돌아왔는데 북한 기준으로 생각하면 남한 정권을 지지하지 않고 그토록 오랜 기간 살아 있었다는 게 기적이다. 임수경이도 마찬가지다. 북한에 왔다가 돌아가서 교도소에 수감됐는데 난방장치가 고장나 추위에 고생한다는 보도를 접하고 교도소에 난방장치가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북한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다. 한국에서 데모, 파업하면 다 북한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선전했는데 그 구호가 단결, 민주, 자주 등으로 북한 지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얼굴도 좋아 보이고 옷도 잘 입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지원물자는 상표를 떼어내고 주는데 그래서 상표 뗀 물건은 한국산이라고 안다. 양말 같은 것도 신어보면 참 품질이 좋기 때문에 "야, 이 새끼들 참 깜찍하다야!"라고 감탄했다. 금강산 배가 들어와도 처음에는 잘 사는 사람만 온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들어오니 잘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말이냐고 놀랬다.
-탈북한 뒤 둘째아들이 처형됐고 친척들도 어려움을 받고 있다는데 그것을 감수하고 탈북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는가.▲적지 않은 사람들이 "너만 잘 살기 위해서 넘어왔냐"고 비겁분자라고 말한다. 물론 탈북자 중에는 저만 잘 살겠다고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범죄를 저지르고 피해 온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내 한 몸 바쳐서라도 통일을 위해 기여하자"는 생각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탈북했다. 내 자신의 안락을 위해서 넘어온 것은 절대 아니다.
-미국에 와서 재미 한인들을 만나 본 소감은 ▲옛날 속담에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고 했는데 딱 들어맞는 말이다. 한국사람들이 미국에서 산다고 했을 때 "너희는 아직도 사대주의에 젖어 사는구나. 자기가 난 땅이 좋지 남의 나라가 좋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생각했는데 미국에 들어선 순간 바뀌었다. 사람들이 자유로우면서도 부지런하고 인격적이며 친절했다. 한국에서는 주부들이 보석으로 치장하고 사치하며 사는데 미주 한인들은 맞벌이로 부지런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입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끝까지 미워했던 미국이었는데 얼마나 우리가 몰랐던가를 느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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