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간 32돌 대하시리즈-제1편 알래스카 한인들 [2]앵커리지
알래스카 주정부는 주민들을 주주의 개념으로 본다. 1975년 프루드호 만의 유전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주정부 수입이 큰 폭으로 늘어나자 알래스카에 1년 이상 거주한 모든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에게는 나이에 상관없이 일종의 배당금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주정부는 유전으로부터 들어오는 수입의 25%를 영구기금(Permanent Fund)에 적립한 뒤 매년 10월 이 기금의 투자 또는 이자 이익금을 인구수대로 나눠 지급했다. 지난해에는 주민들이 1인당 약 2,000달러의 배당금을 받았다. 알래스카 주민들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천혜의 석유자원이 가져다 준 배당금 때문이다.
지난해 주 정부 배당금을 받은 주민들 가운데 한국 성씨 갖고 있는 사람은 6,120명으로 조사됐다. 국제결혼으로 추적이 어려운 사람들을 합치면 알래스카내 한인들은 족히 7,000여명에 달하며 이 중 1,300여 세대 5,000여명은 앵커리지 사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인들이 앵커리지에 찾아든 것은 1950년대 국제결혼한 여성들이 미군인 남편을 쫓아 정착하면서부터였다.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던 한인 인구는 1960년대 중반부터 의사인 정원팔(67)씨를 필두로 박대일(97년 작고), 김부열(67), 이성호(62), 김용운(62)씨 등이 이주하면서 조금씩 늘더니 1972년 말 한인회가 발족한 뒤에는 35세대 100여명이 한꺼번에 정착하면서 눈에 띄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1972년 앵커리지에 들어가 29년째 살고 있는 조진국(64)씨에 따르면 당시 한인들은 한인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대부분이 정착한 지 얼마 안 돼 현지물정에 어두운 편이었기 때문에 정보도 교환하고 외로움도 덜기 위해 적극적으로 한인회 모임에 참여했다. 한인회 모임이 열린다고 하면 350마일 떨어진 페어뱅스에 사는 사람들도 모여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 때만 해도 살림들도 그리 넉넉한 편이 못 됐기 때문에 개인 집에서 모이기 보다 앵커리지에 단 하나뿐이었던 한인 소유 식당이 만남의 장소로 늘 이용됐다.
당시 한인들은 초기 정착자인 처지라 자본형성이 안 돼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 자영업보다는 청소 등 단순 노무직에 주로 종사했다. 하지만 한 건물 청소를 맡으면 밤 시간에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전 가족이 달려들어 함께 일할 정도로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앵커리지에 한국식 마켓이 들어선 것은 올드타이머 노삼용씨가 1977년에 문을 연 서울마켓이 처음이었다.
1980년 4월에는 한인회 중심멤버 45명을 주축으로 한인 라이온스 클럽이 설립됐다. 그 때만해도 한인사회라고 해봐야 손바닥처럼 빤한 바닥이었기 때문에 ‘단체장은 곧 라이온스클럽 멤버’일 정도였으며 간혹 단체장 자리가 비어 있으면 라이온스클럽에서 단체장을 임명하기까지 했다.
한 때는 바람 피우는 유부남, 유부녀가 많다는 소문이 돌자 라이온스클럽 멤버들이 정화위원회를 구성, ‘인민재판’식 청문회를 여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또 1982년에는 당시 새마을운동 중앙본부가 소를 사달라고 해서 라이온스클럽 회원들이 돈을 싸들고 서울에 나갔던 적이 있는데 호화스럽게 꾸며 놓은 본부 시설을 보고는 마음을 바꿔 벽지에 있는 초등학교에 비타민과 회충약, 교자재 등을 사주고 남은 돈은 독립기념관 건립사업기금으로 희사한 뒤 돌아온 것도 일화로 남아있다.
1970년대만 해도 수백명에 불과하던 앵커리지 인구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급증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가 앵커리지에 총영사관을 개설한 것도 1981년의 일이다. 프루드호 만에서 발데스로 이어지는 송유관 공사가 끝난 뒤 알래스카의 경기가 붐을 탄 데다 초창기 땀흘려 일한 대가로 자본을 축적해 자기 사업체를 갖는 한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부는 호텔, 모텔 등 숙박업과 부동산 투자에까지 손을 댈 정도로 성장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LA폭동과 본토 불경기의 여파로 더 많은 한인들이 유입돼 세탁업, 리커스토어 등 다양한 종류의 사업을 벌리기 시작했다. 한인회에 따르면 앵커리지 시내 전체 사업체 수의 12%가 한인들 소유로 집계될 정도로 한인들의 경제력은 지역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는 수준으로 급성장했다.
한인회가 다운타운 인근에 10만달러를 들여 자체 건물을 구입한 것도 1991년의 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해 보이는 건물이지만 시민권 영어강좌와 노인들의 모임 장소로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IMF한파의 영향으로 지난 98년 총영사관이 폐쇄된 후에는 한인회가 현지 동포들의 민원업무를 처리하는 창구 역할까지 맡고 있다. 서성호 한인회장은 "올해 3월 장애자 올림픽이 열렸을 때와 지난해 광복절 기념행사 땐 500명 이상의 한인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행사를 치를 정도로 결속력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한인회가 매 2년마다 만들고 있는 한인록에 따르면 현재 한인들이 가장 많이 종사하고 있는 업종은 식당업으로 앵커리지 시내에 있는 44개의 식당이 한인 소유인 것으로 집계됐다. 한식당은 물론이고 웬만한 중식당과 일식당 등 동양음식을 파는 식당의 90% 이상은 한인들이 운영하는 업소라고 보면 된다. 이 밖에 자동차 정비·수리업소가 19개, 이발소와 미용실, 미용재료상이 14개, 호텔 13개, 세탁소 9개, 식품점 7개, 비디오 대여점이 6개 등이다.
과거 한인사회가 한인회를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현재의 한인사회는 교회 중심으로 움직여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앵커리지 시내 교회는 19개. 인구 300명 당 1개꼴로 교회가 있다. 300여명의 한인이 다니는 열린문교회 유재일 목사는 "지난 94년 이 곳에 올 때만해도 신앙의 불모지에 유배를 간다는 느낌이었는데 최근에는 1년 사이에 교회 5개가 새로 생기는 등 영적으로 풍족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면서 "교인들에게 신앙심을 심어주고 한글교육을 통해 2세들에게 뿌리의식을 심어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앵커리지의 한인 정착 역사가 30년이 흐르는 사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숙한 면모를 갖추게 됐지만 1.5세와 2세의 숫자가 늘어나지 않고 있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알래스카 내 규모를 갖춘 대학이라고는 알래스카 주립대학 밖에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2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진학을 위해 타주로 빠져나간다. 일부 부모들은 자녀들과 헤어지는 아쉬움은 있지만 보다 나은 교육여건과 생활환경을 찾아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막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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