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 존재하는 온갖 민족 가운데 나름대로 건국신화가 없는 민족은 드물다. 한민족에게 단군신화가 있다면 로마인들에게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의 전설이 있다. 군신 마르스와 처녀 사제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 형제는 바구니에 넣어진 채 강물에 던져지지만 늑대 젖을 먹고 자라나 외할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한 외할아버지의 동생을 죽이고 로마를 건국한다.
세계 각국에 전해져 내려오는 건국 설화를 살펴보면 두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건국자가 대부분 신이나 동물을 조상으로 했다는 점이다.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에서 천신 이자나기의 왼쪽 눈에서 나온 일본 황실의 원조 아미테라스 오미가미에 이르기까지 동서를 막론하고 평범한 인간의 가정에서 태어나 국조가 된 인물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또 한가지 특징은 나라를 세운 인물은 한결같이 칼잡이라는 점이다. 동생 레무스까지 죽이고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는 물론이고 다윗과 조지 워싱턴, 모택동에 이르기까지 나중에 역사상에 등장하는 숱한 ‘건국의 아버지’ 가운데 장사꾼이나 학자, 기술자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이 두가지 사실은 국가의 기원에 관해 흥미로운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국가란 어떻게 처음 생겨났으며 국가의 창건자들은 왜 극구 자신이 평범한 인간의 자손임을 부인하려 했을까 하는 점이다. 국가의 기원에 관해 가장 유명한 학설은 사회계약설이다. 홉스와 로크, 루소등 근대 서양 철학자들이 펼친 이 이론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에도 불구, 역사적으로는 픽션에 불과하다는 게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다.
국가의 출현은 BC 3000여년 경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업 혁명과 일치한다. 인류가 수렵 채집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을 때는 잉여 생산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 벌어 그날 먹으면 다행일 정도로 먹을 것이 귀했고 남는 것이 있다하더라도 곧 썩어 남겨두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규모 영농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한 여름 농사로 혼자 먹고도 남을 만한 수확이 가능해진 것은 물론 이를 창고에 쌓아두고 오래 보관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 잉여 생산물을 노린 떼강도 집단이 농민들을 인질로 삼고 정기적으로 공물을 상납 받기 시작한 게 국가의 기원이란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국가관이다. 국가는 계급간 착취의 도구라는 학설은 공산주의가 몰락한 지금도 가장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집권자들이 왜 애써 자신이 인간의 후손임을 부인하려 했는지 짐작이 간다. ‘너나 나나 똑같은 사람인데 왜 내가 너를 먹여 살리기 위해 피땀을 흘려야 하느냐’는 피지배 계급의 항변에 대꾸할 핑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국가와 세금의 일란성 쌍생아적 관계는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열쇠다. 근대 민주주의 운동의 효시로 불리는 마그나 카르타(1215)도, 그 연장선 위에선 명예혁명(1688)도, 미 독립전쟁(1776)도, 프랑스 대혁명(1789)도 그 근본 원인은 국왕의 중과세에 있다. 말로 국가의 주권이 어디 있는지 백날 떠드는 것보다 누가 누구에게 세금을 매길 권한을 갖고 있느냐를 살피는 게 급선무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주 레이건 집권이래 10여년 만의 대대적 세금 감면안에 서명했다. 부시는 이 안이 불황의 초기 단계에 진입한 미국 경기를 살리기 위해 필요하다고 밝혔지만 이는 핑계에 불과하다. 작년 미국 경기가 초 호경기를 구가했을 때도 부시는 대대적 감세안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에너지 가격이 올라도 감세,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도 감세 하는 식으로 부시는 눈만 뜨면 감세의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Read My Lips. No New Taxes’를 외치다 막상 중요한 순간 민주당과 타협해 세금을 올렸다 낙선의 고배를 마신 아버지의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 본 부시로서는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이것을 어겼을 때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이슈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음이 틀림없다. 국가가 거둬들인 세금의 수혜자인 중하류층을 지지기반으로 갖고 있는 클린턴이 증세와 분배의 정치를 펴 탄핵의 위기 속에서도 버텨간 것처럼 과세의 부담을 대부분 지고 있는 고소득층을 지지자로 갖고 있는 부시도 자기가 누구 덕에 대통령이 됐는 지 잊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역사적 감세안의 발효는 워싱턴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실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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