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로우의 한인들
▶ 한인수 52명 대부분 식당, 택시업
앵커리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알래스카의 제2도시 페어뱅스를 거쳐 2시간 남짓 북쪽으로 날아가면 ‘지구에서 위도 상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도시’(Top of the World) 배로우가 한 눈에 잡힐 듯 나타난다.
바다를 포함해 사방이 눈과 얼음으로 덮여있는 데다 인구라고 해봐야 고작 4,000여명에 불과한 소도시이기에 배로우에 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항공편뿐이다. 반경 200마일에 걸친 광활한 설원과 5월에도 꽁꽁 얼어붙어 있는 북극해의 장관은 도시 전체를 하얗다 못해 파랗게 느껴지게 할 정도다.
비행기서 내려 허름한 터미널에 들어서면 1,000스퀘어피트 남짓한 대합실이 사람들로 가득 차 북새통이다. 출영객도 있었지만 앵커리지에서 공수한 화물을 픽업하려는 에스키모 원주민과 상인들이 대부분이다.
채소 등 음식류는 물론 생필품까지도 전부 시애틀과 앵커리지에서 비행기로 실어오기 때문에 하루에 두 번 비행기가 도착할 때마다 공항 대합실은 사람과 물건이 뒤섞여 북적댄다. 노동력이 귀하고 운송료가 비싸기 때문에 웬만한 도시보다 물가가 평균 두배 정도 높다는 앵커리지 한인의 말이 실감났다. 택시 기본요금은 5달러, 개솔린이 1갤런당 3달러60센트, 12인치 피자 한판에 32달러, 아침식사용 샌드위치 한 접시가 8달러…
공항 밖으로 빠져나와 사면이 눈과 얼음으로 가로막힌 고립된 도시의 거리를 바라보면 위락시설 하나 변변한 게 없고 여름에도 눈보라가 몰아치는 삭막한 북극권 도시에 왜 한인들이 살러 왔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된다.
배로우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샘 앤드 리’(Sam & Lee) 식당과 ‘아크틱캡’(Arcticab) 택시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형용(53)씨는 18년째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터주대감. 김씨에 따르면 배로우에 한인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다.
1968년 북동쪽으로 200마일 떨어진 프루드호 만에서 거대한 유전이 발견돼 하루아침에 붐 타운으로 급부상하자 오일머니로 한 몫 잡으려는 외지인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고 이 틈에 적지 않은 한인들도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찾아 배로우에 닻을 내렸다. 노동력이 귀하다 보니 임금도 높았다.
목수는 시간당 임금이 50달러, 전기공 70달러, 식당에서 접시닦이를 해도 시간당 16달러는 거뜬히 벌었다. 고용주들이 숙식까지 제공해 주고 이렇다할 위락시설도 없다보니 월급을 받으면 고스란히 저금을 하게 돼서 ‘고생은 되지만 단시간 내에 돈을 모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 타지의 한인들에게까지 퍼져나갔다. 불모의 땅인 배로우가 이들에게는 오히려 기회의 땅인 셈이었다.
처음에는 돈을 벌기 위해 들어온 이방인에 불과했지만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인들은 배로우의 상권을 장악했다. 배로우 시내에서 영업 중인 식당 8개 가운데 6개가 한인 소유인 것만 봐도 한인들의 악착같은 경제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샘 앤드 리’ 외에도 ‘오사카’ ‘쇼군’ ‘노던 라이트’(Northern Light) ‘브로워스 카페’(Brower’s Cafe) ‘켄스’(Ken’s) 등 손님이 많이 끓는다는 식당은 모조리 한인들 차지다.
’샘 앤드 리’를 운영하는 김형용씨의 경우 1989년 가게를 인수한 후 3년 동안 무려 80만 달러를 쓸어들였고 중국음식과 피자를 파는 ‘노던 라이트’ 식당의 백혜순(39)씨는 1996년 2월 한국의 친지에게서 3만달러를 빌려 식당을 차린 지 약 1년여만에 20만달러를 벌었다고 한다. 백씨는 오지의 배로우에서 머세데스 벤츠를 모는 유일한 사람으로도 현지사회에 잘 알려져 있다.
배로우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을 직업별로 살펴보면 식당주인과 종업원이 20여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는 택시기사가 10명이다. 예전에는 식당과 택시운전 외에 다른 직업을 가진 한인은 없었으나 요즘에는 교사(2명)와 교육구 직원(1명)도 생겨났다. 한달 반된 아기부터 중학교 3학년 학생까지 아이들의 숫자는 14명이지만 아홉 세대만이 부모-자녀의 정상적인 가정을 형성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돈을 벌겠다는 일념에 단신으로 배로우를 찾은 이들이다.
하지만 배로우에 가는 한인들이 모두 정착에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숙식 제공에 높은 월급을 보장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LA와 시애틀 등지에서 꾸준히 사람들이 찾아들었지만 대부분 몇 달을 견디지 못하고 배로우를 떠났다. 1년만 일해도 2만5,000~4만달러의 현찰을 모을 수 있었지만 가족,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며 추위와 황량한 도시환경에 맞서 싸우기가 힘들었던 게 주된 이유였다.
절박한 사정에 쫓겨 배로우에서 마지막 재기의 몸부림을 치는 한인도 있다. 7년째 배로우에 살고 있는 이모(45)씨가 그런 경우다. 1980년부터 13년 간 LA 인근에서 살았던 이씨는 도박중독에 빠져 가정과 재산을 모두 날리고 설상가상 격으로 4·29폭동을 맞아 사업체도 파산한 후에 배로우를 찾았다.
이씨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내가 갈 곳은 없다는 생각으로 이 곳까지 오게 됐다"며 "내 생애 주어진 마지막 재기의 기회로 생각하고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현재 김형용씨 소유의 택시회사 ‘아크틱캡’에서 일하고 있다.
정착한 이유와 꿈은 제각각 이지만 신문이나 비디오를 통해 한국문화를 접하며 외로움을 달래기는 다른 도시와 다를 게 없다. 거리 상으로는 LA나 서울과 3,000∼4,000마일 떨어져 있지만 배로우의 한인들은 여전히 한국 문화권에서 살고 있다. 며칠의 시간차는 있지만 LA나 시애틀에서 한국일보 등 일간지를 우송 받아 보고있고 몇몇 가정에서는 한 차원 높여 인터넷을 통해 한국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있다. 앵커리지에서 한국서 온 연속극이나 쇼 프로그램 비디오테입을 빌려다 보는 것도 다른 대도시 한인들과 똑같다.
또 한인목사가 세운 교회가 있어 주일이면 한국어로 예배를 보고 어린 아이들은 한글을 배운다.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의 파송목사로 1996년 3월 배로우에 들어가 개척교회를 세운 박귀재 목사는 "싱싱한 과일이나 야채를 볼 때면 이 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동토의 땅에 영적 풍요로움을 심고 자라나는 2세에게 뿌리의식을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추위와 외로움이 싫어 떠난 사람도 있고 자식교육 문제 때문에 떠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배로우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평생을 살고 싶어하는 별난 한인도 있다. 이들이 배로우에 남고 싶어하는 이유는 프루드호 만 유전의 위성도시로서 그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
’노던 라이트’ 식당을 운영하는 백혜순씨는 "배로우는 노력하고 땀흘린 만큼 충분한 대가를 얻을 수 있는 곳"이라며 "프루드호 만에서 원유와 함께 천연개스가 본격 개발되면 또 다시 경제 붐이 일어나 무한한 가능성을 발산하게 될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남편 백필현(45)씨와의 사이에 신디(15), 백희(10), 승이(5), 승미(4), 승아(6주) 등 딸만 5명을 두고 있는 백씨는 "범죄 없고 공기 맑고 돈벌이 좋은 배로우를 떠날 이유가 없다"며 "앞으로도 20∼30년을 살면서 아이들을 때묻지 않게, 하얗게 키우는 게 내 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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