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원
한국인에게서 태어난 한 어린이의 미래는 출생 순간에 이미 계획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바드 대학교 진학’이다. 대부분의 한인 어머니들은 자식들이 궁극적 성공의 좁은 문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즐거이 자신을 희생한다.
명성과 부의 길로 가는 길인 하바드의 신비성 즉 SAT, 하바드, 여섯자리 숫자의 수입, 박사학위와 의학박사, 월스트릿, 기업최고 경영자, 종신교수직 그리고 벤츠차 등은 한국인과 이곳의 한인의 정신 속에 깊이 흐르고 있다.
하바드,예일 그리고 프린스톤대학 입학 순서로 방과후에 하는 학원들은 전 미주지역 한인밀집지역에서 번창하는 사업이 되고 있다. 아이비리그 대학교에 대한 교육 투어는 연례행사이고 대학진학을 위한 학원들은 한인 신문 광고를 통해 이민가정의 부모들을 유혹하고 있다. 또 그 신문들은 매일 명문대학에 관한 기사들을 다루고 있다.
많은 부모들은 아주 극단적이 되어 아들의(결코 딸들은 아님)이름을 지속적인 심리적 압박용으로 하바드와 예일이라고 짓는다. 나 개인적으로 적어도 하바드라고 이름을 가진 3명을 알고 있다.
하바드라는 이름의 최고의 걸작품은 샌프란시스코의 전국민주당 후원회의 전 명예공동의장이며 캘리포니아의 3개 은행에서 3천 4백만달러를 사기해 사법당국으로부터 수배됐던 하바드 지씨이다.
전국민주당위원회가 지씨를 공동의장으로 임명한 것은 그가 아시안 아메리칸 커뮤니티로 부터 적어도 35만달러를 모금할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이었다.
두려움의 대상인 한국중앙정보부와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베일에 싸인 국제 사업가인 그는 하바드에 가는데 비록 실패했지만 야망에 찬 인생설계를 했었다. 확고한 자금 모금가로서 전 하원의장 토마스 피 ‘Tip’오닐, 1976년과 1980년 지미 카터의 대통령선거,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 제리 브라운, 고인이 된 상원의원 알란크랜스톤 그리고 기타 정치인들은 물론 월터 몬데일 대통령 선거에 연관되어 있다.
야심에 가득찬 하바드맨에 대한 얽히고 설킨 음모가 지금은 없어진 새크라멘토 유니온신문에서 3부에 걸쳐 폭로된 후 1 주일만에 지씨는 로이드은행, 한국외한은행 그리고 한일은행에서 34만달라를 사기친데 대해 연방배심원에 의해 15개항목에 걸쳐 기소됐다. 유니온신문의 사건 담당 기자들이 지씨의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자민주당위원회는 지씨의 임명이 시기상조였고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한 파산청문회에서 재판관은 지씨가 고의적으로 “속이고, 훔치고 그리고 사기" 하려고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곧 그는 당시 군사정부의 강자인 전두환체제하의 한국으로 도망갔으며 태평양 양편, 즉 한국과 미국에서 그의 출현에 대한 기사가 보도됐다. 아시아계 신문의 일부는 여전히 미해결된 상태인 “Harvardgate"의 추잡함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한편 또 다른 종류의 새롭고 놀라운 하바드게이트가 형성되고 있다.
지난 10년간 나의 눈을 의심할정도로 한인 사회에서는 사회와 인종간의 정의를 위해 싸우고 지켜줄 그리고 치유해 줄 사람을 갈망하고 있을 때 하바드와 아이비라는 곳에서는 신 양반계급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상관없다. 나는 아시안 아메리칸의 유교적 사고에 오랜동안 젖어있는 하바드엘리티즘과 정반대의 삶을 보여 준 하바드 출신의 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그녀 모르게 기록하게 되었음을 축복으로 여긴다.
그녀의 이름은 조엔 김이며 미국의 도심에서 가장 비참하게 살고 있는 자의 후원자요 치유자이다. 또한 늙어가는 초기 이민자인 나를 감화시켜준다.
조엔 김은 하바드 입학의 이상적 조건 즉 위트니고등학교, 졸업식 고별연설자, 전국우수장학생, Robert C. Byrd 명예장학생, 그리고 Los Angeles 타임즈의 뛰어난 학생상 등으로 쉽게 자격요건을 갖추었다.
하바드졸업 후 세상은 그녀에게 무한한 가능성이었을 것이다.
10년전 찌는 듯이 더운 6월 오후 어느날 큰 슐더백을 맨 한 마르고 수줍어하는 소녀가 한인 타운에 있는 나의 초라하고 지저분한 편집실로 살그머니 들어와 거의 들을 수 없는 속삭임으로 여름방학동안 인턴을 요청했다. 그녀는 지금 막 고등학교를 마쳤고 가을에 대학 진학 예정이라고 말했다. 첫 눈에 꽃잎같이 부러지기쉬운 갸냘픈 모습의 우아함에 감명받았다. 이상하게도 나는 숭고한 존재를 느꼈다(그리고 신문기자로서의 감각이 정확함이 판명됐다.)
그 당시는 지역미디어의 취재경쟁에 의해 선동된 “한흑 갈등"이 확산되는 어려운 때였다. 매시간 총성과 강도는 흔한 일이었으며 매일의 살인 사건은 열악한 곳에서 부부운영의 소규모 상점을 운영하는 주인들을 괴롭혔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때 조엔 김은 주로 아이비리그 재학생과 졸업생인 약20명의 인턴 그리고 한층 나이가 많은 정규 직원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광복절인 8월15일에 창간된 한국일보 주간 영자신문의 첫 기사를 뛰어나게 썼다.
마음을 아프게하는 도시빈민지역의 갱과 폭력, 급격히 변하고 있는 인구 그리고 인종간의 갈등에 관한 추적기사들은 그녀의 짧은 여름견습기간 신문의 앞면을 계속해서 장식했다. 밤이고 낮이고 아주 위험한 지역으로 사라지곤 했으며 한인타운에서 싹트고 있는 갱에 대한 최초의 현장취재를 했다. 범죄에 대한 베테란기자라 생각하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코리아타운을 포함하는 미국에서 가장 범죄가 많은 윌셔지역안에 상존하는 위험을 그는 철저히 무시했다. 그는 거의 앞뒤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겁이 없었다.
눈으로 보면서 믿게 됐다. 그가 초대한 갱멤버들과 함께 그의 집에 초대되었을때 마치 그들이 오래동안 사귄 동료요 자매인 것같이 상호신뢰하는 이야기로 펑화스럽게 집에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불과 18세밖에 안됐는데.
9월이 오자 그녀는 바람같이 사라져 하바드대학교로 갔다. 곧 4.29가 터졌고 주간 영자지도 없어졌다. 그리고 나는 간이식 수술을 받고 반동면 상태에 빠졌다.
4번의 여름이 지나간 후 나는 그녀로부터 하바드 졸업후 미국 수도에 있는 Price Waterhouse에서 일하게 정해졌으나 의료선교사직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들었다.
“UC 센디에고 의과대학에서 입학을 허가했는데 그것은 선생님 추천서 때문이었습니다." 라고 1996년 8월 편지를 썼다.
“그러나 금년에는 가지 않을겁니다. 선생님에게도 흥미가 다른 기회가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준 박이라는 한인 상인이 그의 디스카운트스토어 바로 위에 있는 스트립바를 사서 태권도장(14th Street NW)으로 개조했습니다.
“그는 이웃의 저소득층 아이들(주로 아프리칸 아메리칸)을 위해 그 도장을 사용했습니다. 아이들이 돈이 없어 그가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그는 신학석사를 갖고 있으며 6급의 검은 띠의 자격을 딴 사람을 고용해서 가르치게 했습니다.
“워싱톤 포스트지가 지난 주 그에 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이 정말로 다르게 변한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한 이웃들을 인터뷰했습니다. 미스터 박은 좋은 친구가 되고 길거리에서 배회보다는 좀더 건설적인 다른 것을 제공하고 싶었다고만 이야기했습니다.
“미스터 박은 저의 교회(Global Mission)에 다녔습니다. 저의 교회에서는 좀 더 지역에 참여하고 다른 소수인종에게도 접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해왔습니다.
“저희들은 도장을 관리하고 있는 미스터 박의 아들(스티브)과 이야기했습니다. 스티브는 도장을 다시 열었고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하나의 커뮤니티가 형성되어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가족전체가 이곳을 이웃과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교회로 생각하고 있으며 인종적인 화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스티브는 또한 아이들이 거리에서 배회하지않도록 학교가 끝난 후 프로그램 및 가르침을 시작해 줄 것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 교회의 노력이 커뮤니티에 미칠 수 있도록 선뜻나서지는 않고 있습니다.
“저는 의과대학에 갈 계획으로 지난 주 Price Waterhouse 를 사직했습니다. 그러나 3일전 스티브와 만난 후 저의 계획을 바꿨습니다!
“나로서는 정말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한 친구의 질문-만일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때문이었고 나의 대답은 ‘그이라면 이 아이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나의 결심은 확고해졌습니다.
“저는 Price Waterhouse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너무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함으로 양쪽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후에 자원봉사를 할 수 있도록 임의대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파트타임 일을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단지 기도할 뿐이며 교회를 커뮤니티안으로 옮겨오는 것을 시작하기 위해 다른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거야 말로 신나는 일입니다. 저로 하여금 항상 저의 도시의 인종관계에 좀더 관여하도록 고무시켜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일이 진전되는대로 계속해서 연락 드리겠습니다!
“건강을 유념하시기 바라며 자신을 잘 돌보십시오. 조엔 김(스마일 사인으로)."
이것이 5년전 여름이었다. ?미국의 어두운 내심으로 들어가는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고민 끝에 내린 결심을 알려주는 UNICEF 카드는 나로 하여금 전형적인 하바드 출신인 조엔 김의 숨겨진 면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줬다.
현대의 잔 다크는 외롭지 않다. 그녀는 이 나라의 황량한 도시에서 조용히 눈에 띄이지 않게 사랑으로 하고 있는 도시 혁신 운동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여전히 아메리칸 드림을 진홍색으로 꿈꾸는 한인 어머니들이여 다음 컬럼을 기다려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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