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임스 한 LA 시장 당선자
▶ 페퍼다인대 졸업 시검사로 첫 공직, 폭동후 시장꿈 리오단에 밀려 포기
LA는 ‘변혁’ 대신 ‘검증된 리더십’을 선택했다. 16년 동안 LA시 검사장으로 정치력과 행정능력을 인정 받아왔던 제임스 한 후보는 5일 실시된 시장선거 본선에서 히스패닉의 기수 안토니오 비야라이고사 후보를 물리치고 새 천년, 미국 제2의 거대도시 LA를 이끌어 갈 지도자로 부상했다.
’열린 정부, 범죄 없는 거리’를 공약으로 내건 한 당선자는 공직자의 길에 들어선 지 20년 만에 아버지인 케네스 한 전 카운티 수퍼바이저의 큰 그림자에서 벗어나 ‘시장 제임스 한’으로 당당히 홀로 서기에 성공했다.
<제임스 한 누구인가>40년간 LA카운티 수퍼바이저를 지낸 케네스 한은 주말이 되면 아들 제임스를 데리고 LA시내에 나가 유권자들을 만났다. 유권자들의 목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뛰어가야 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어린 제임스에게 심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간혹 도로가 심하게 훼손됐거나 교통정체가 심한 곳이 있으면 관계 부서에 연락해 며칠 안에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참다운 공직자는 단순히 문제를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행동에 옮겨 해결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값진 교훈을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다.
제임스 한 LA시장 당선자는 한 평생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한 길을 걸었던 아버지에게서 참다운 공직자의 모습을 배웠다. 1975년 페퍼다인 법대를 졸업한 뒤 시 검사(1975∼1979년)로 잠시 공직을 맛봤던 한 당선자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변호사의 길을 포기하고 1981년 31세의 나이에 시 재무관으로 본격적인 공직생활을 시작했고 빠른 출세가 아버지 후광 때문이라는 일부의 질시와 냉소를 극복하고 34세 때인 1985년에 당당히 시 검사장에 선출됐다. 그의 능력과 비전이 단지 부친의 후광 때문만은 아니라는 게 증명된 셈이다.
한 당선자가 처음으로 시장이 되겠다는 꿈을 내 비춘 것은 지난 1993년. LA폭동을 전후해 치안이 불안한 상태여서 검사장인 배경이 충분히 유권자들에게 어필할 것으로 나름대로 자신했었다. 그러나 당시 43세였던 그는 공직자로서의 생명을 걸고 시장에 도전하기에는 아직 젊었던 데다가 여동생 재니스 한이 연방의회에 출사표를 던졌고 경쟁상대인 백만장자 리처드 리오단 후보를 자금 동원력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 일단 꿈을 접어두기로 했다.
이후 한 당선자의 행보는 공직자 이미지에서 벗어나 정치적인 색채를 풍기기 시작했다. 시 검사장으로써 꼭 참석하지 않아도 될 커뮤니티 행사에도 부지런히 쫓아 다녔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언론 앞에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한인을 비롯한 소수계 인재들을 과감히 시 검찰에 기용, 발을 넓혔고 치안, 노인복지 문제에까지 관심을 보이는 등 훗날 시장출마를 위해 착실하게 기초를 다졌다.
한 당선자가 검사장 재임 후반기에 가장 역점을 뒀던 부문은 ▲갱 범죄퇴치 ▲가정폭력 예방 ▲슬럼건물주 집중단속 등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한 검사장은 강력범죄의 주원인으로 지적돼 왔던 갱들을 근원적으로 뿌리뽑기 위해 법원에서 갱 활동금지 가처분명령을 받아내 시행에 옮겼으며 가정폭력 예방과 슬럼건물 단속을 위해서는 전담 수사반을 신설하거나 대폭 강화하고 관련 시 조례들을 보강했다. 한 당선자의 이 같은 노력은 ‘말’로만 그친 게 아니라 범죄율 감소, 피의자 처벌강화 등 실제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결국, 참된 지도자 상을 몸소 실천했던 부친 케네스 한의 정신적 유산과 20년에 걸친 오랜 공직경험 위에 겹겹이 누적된 일선 행정관리 능력, 그리고 말이 아닌 행동과 실천을 통해 쌓아온 대민 신뢰도는 그가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게 된 원동력이 됐다.
<주요 경력·학력>■나이: 50세(1950년 7월3일)
■출생지: LA
■현 거주지: 샌피드로
■학력: 맨체스터 애비뉴 초등학교, 호레스 맨 중학교, 루서런 고교 졸업
페퍼다인대 영문학과 졸업(1972년)
페퍼다인대 법학과 졸업. 변호사 시험합격(1975년)
■경력: LA시 검사(1975∼1979년)
변호사 개업(1979∼1981년)
시 재무관(1981∼1985년)
시 검사장(1985년∼현재)
■당적: 민주당
■가족사항: 부인 모니카와 1984년 결혼, 딸 카리나(11), 아들 잭슨(8)
<한인사회와의 인연>제임스 한 LA시장 당선자는 부친인 케네스 한 전 카운티 수퍼바이저가 1970년대 중반 코리안퍼레이드에 그랜드마샬로 참가하면서 한인사회에 대해 눈을 떴지만 직접적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1년 전인 1990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강력범죄가 기승을 부려 한인상인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피해를 입자 시 검사장이었던 그는 연방정부에 한인 범죄피해자를 위한 특별예산지원을 요청했다. 3년 간에 걸친 끈질긴 노력 끝에 한 당선자는 연방정부의 승인을 받아냈고 한인 김동조씨를 고용, 1993년 한인범죄피해자 보조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시 검찰은 약 20년 전부터 범죄피해자 보조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으나 특정 소수계를 위해 예산을 별도 편성한 것은 한인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93년 12월부터 지금까지 모두 1만1,290명의 한인이 총 300만 달러의 보조금 혜택을 입었다.
1993년 여동생 재니스 한이 연방의회에 도전했을 때 한인들이 선거자금을 모금을 해주면서 한인사회의 정치적 잠재력을 인정한 그는 1995년을 전후해 한인검사를 대거 채용하면서 차츰 한인사회와의 접촉의 폭을 넓혔다.
특히 과거에 13년동안(1969∼1974년, 1979년∼1987년) 부친의 비서관을 지냈던 네이트 홀든 시의원은 그에게 한인사회로 통하는 직접적인 창구가 돼줬다. 하기환 한인회장, 스캇 서 후원회장 등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한인들은 이 시기에 한인 검사나 홀든 시의원 등을 통해 인연을 맺은 인사들이다.
한 당선자의 한인사회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시 검찰에 근무중인 한인검사들의 숫자만 봐도 알 수 있다. 현재 시 검찰에서 일하고있는 한인 검사는 제리 백, 그레이스 이, 로버트 차 등 모두 12명. 한 관계자는 "한 당선자가 한인검사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고있어 단순히 상·하급자 관계로만 설명하기는 힘들다"면서 "최근에 와서는 공식, 비공식 석상에서 ‘내 성씨도 한인들과 같은 한씨이기 때문에 나도 절반은 한인’이라며 친밀감을 표시할 정도"라고 말했다.
<공약>제임스 한 LA시장 당선자는 자신이 이끄는 시 정부를 ‘열린 정부’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시장과 주민들이 언제나 교감을 가질 수 있도록 시장실의 문을 활짝 열고 올해 안에 구성될 예정인 주민의회(Neighborhood Council)를 통해 민의가 시정에 충분히 반영되도록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밖에 한 당선자는 치안강화와 교육개혁, 교통개선, 경제활성화 등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공약들을 내세웠다.
■치안강화: 경관 1,000명 증원, 커뮤니티 폴리싱 활성화
■교육개혁: 과밀학급 해소를 위한 학교증설, 애프터스쿨 프로그램 확대
■교통개선: 참단 교통신호 시스템 도입. 매년 혼잡 교차로 25개 지정, 도로확장 공사
■경제활성화: 신규사업체에 첫 2년 간 비즈니스세 면제, 중소업체 비즈니스세 단계적 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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