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몇 번 갔어도 연극을 볼 기회가 되지 않아 늘 섭섭했다. 그 이유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18일, 런던에 있는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에서 ‘리어왕’을 보았다. 제임스 버베이지에 의해 런던에 처음으로 연극 공연장이 건설된 1576년 이전까지만 해도, 연극 공연의 현장은 술집이나 그 정원, 대학, 개인주택 등이었다고 한다. 목재로 건축된 글로브 극장이 건설된 것은 1599년의 일이고, 중간에 한번 불이 났으나 곧 재건되었으며 현재의 극장으로 다시 세워진 것은 미국 배우이며 감독이자 제작자였던 샘 워너메이커의 의지의 소산이라고 한다.
공연장은 그린색 오크 재목으로 지어진 입체적인 원형극장으로, 나무로 된 벽에 출입문이 하나 있는 게 무대 장치의 전부였다. 필요한 의자며 테이블은 배우들이 직접 운반하면서 연극을 진행했다. 3층으로 된 객석은 스타디움식 좌석이니 어디에서든 무대가 잘 보였고, 객석 각 층마다 그 가장자리는 이름 모르는 들꽃 말린 것으로 장식해 놓아 마치 16세기 선술집에 앉아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리어왕’을 보러 가기로 한 날, 우리들은 고전적인 셰익스피어 연극을 본다고 미리부터 준비한 우아한 정장들을 떨쳐입고 호텔을 나섰다. 막상 그곳이 야외 원형극장이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너무 추워서 따뜻한 차를 마셔도 몸이 덜덜 떨렸고, 결국 그곳 매점에서 두꺼운 옷을 하나씩 사서 멋 내려던 하늘하늘한 정장 위에 겹쳐 입고 구경을 해야만 했다.
연극의 진행도 우리의 예상을 뒤집었다. 리어왕은 번쩍이는 왕관도 쓰지 않았고, 공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의상 역시 단순했고 색깔도 화려하지 않았다. 게다가 배우들은 화장을 했는지 안 했는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맨 얼굴이었다. 무대 앞은 또한 그냥 빈 마당이었는데, 관객들은 그 마당까지도 채울 만큼 만원이었다. 거의 3시간동안 연극이 끝날 때까지 그들은 서서 연극을 관람하면서, 배우들과 함께 , 아니 그 객석도 무대의 한 부분으로 배우들은 종횡무진 누비며 열심히 자기 연기에 열중했다.
고전연극에 대한 고정관념과는 달리, 그냥 열려진 무대, 관중석 곳곳에서 대사도 하고, 연주도 하고, 여러 방향 출입구에서 뛰어나오는 연기자들은 마치 내가 연극 속의 인물처럼 착각하게 해주어서, 잠깐씩,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디인지 생각을 해봐야 했다.
더욱이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하나로 꼽히는 연극 ‘리어왕’은 2001년에 와서 더 이상 비극적이지 만은 않았다. 배우들의 현대화된 모습도 그러하고, 대사들이며 배우들의 몸짓들도 대단히 희화적이어서, 관중들은 자주 폭소를 터뜨리면서, 어렵다는 셰익스피어 작품을 아주 편안하게 해석하고 소화해내었다.
퍽 신선한 느낌이 가슴을 쳤다. 예술에 대한 관점이나 해석이 시대의 흐름에 맞춰 급격하게 변하고 있음을 피부로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단 연극 뿐만이 아니다. 미술계 역시 지난해에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있었던 ‘센세이션’ 전시회처럼 지금까지의 보편적 예술관과는 다른 놀라운 관점의 표현세계로 변환하고 있으며, 클래식 음악계도 이젠 시대가 요구하는 곡 해석과 연주 방법 영역의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다음 날 나는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스트라트포드-어펀-에이본을 22년만에 방문했다. 그간 동네는 몰라보게 상업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의 생가도 다시 정리가 되어서 그의 연극 공연에 입었던 화려한 의상들 전시는 온데 간데 없어졌고, 그의 집 앞길인 헨리 스트리트엔 인파가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거기서 제일 맛있다는 찻집에 앉아 밖을 바라보는 내 마음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는 결코 인도와 바꿀 수 없다는 이유가 너무도 명확히 눈에 보여졌다. 그는 사양길에 들어선 영국의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거대한 상품, 문화상품이었던 것이다. 세기(世紀)를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하면서, 인간의 문화적 욕구를 끊임없이 채워주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었다. 부러웠다. 그런 나라의 국민들은 얼마나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을까. 나도 그런 자부심을 갖고 살고 싶고, 그런 자부심을 주는 나라를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이 이는 것은 어디 나 뿐이겠는가?
우리의 문화 유산이 인류를 새롭게 감동시키는 힘을 끊임없이 갖도록 하는 노력이 없는 한, 우리는 언제나 “이국(異國)의 문화관광객”이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지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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