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공부를 해 놓고, 왜 성직자는 안되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아온다. 이 질문은 “목회를 왜 하지 않느냐?”는 질문과도 상통된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중 하나다. 그렇지만 “치유와 돌봄의 능력이 부족하기에 성직자도 못되고 목회도 못하고 있다”라고 답한다면 대답이 될까.
‘성직(聖職)의 길’이란 아무나 못가는 길이라고 늘 생각해 온다. 하지만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킨 하늘의 큰 힘이 작용하고 ‘사람’이 된다면 언젠가는 가리라 마음먹고 있다.
2000년전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유대계 법학자였다. 예수 믿은 스데반이 돌로 쳐 죽임을 당할 때 박수를 쳤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향할 때 하늘의 계시가 내린다. 하늘로부터 강한 빛을 받고 예수의 음성을 들은 사울 은 3일 동안 장님이 됐다. 그후 그는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이때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독신으로 평생 예수를 전도하다 죽었다. 신약성경의 12편이 바울 이 쓴 서신일 정도로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어 논 사람이다. 예수가 기독교 창시자라면 바울 은 기독교를 일으킨 사람이다.
나의 성직자 모델은 바울도 되지만, 그보다 하와이 문둥이촌 선교사였던 데미안 신부이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오로지 소외되고 갈 곳 없는 문둥이들에게 소망의 복음을 전하다 문둥병에 걸려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바울도, 데미안도 독신으로 성직의 길을 가다 생을 마감했지만 이미 결혼해 자식까지 둔 나로서는 그런 길을 가기가 이미 늦어버린 감도 없지 않다.
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나의 신학공부는 미국에 와서도 계속됐고 지금도 머리와 생활속에선 이어지고 있다. 그 이어짐 속에는 거시적 물음과 현세적 모순, 자신과의 갈등 등의 질문으로 꽉 차 있다. 이렇듯 치유와 돌봄보다는 너무 형이상학적 이론에 치우쳐 성직자의 길로 못 가는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나열해 보라면 우주와 하나님·자연과 인간·자유·선과 악·영생·부활·원죄·태어남과 죽음·영원과 신비·인간의 한계성·역사의 오류·사회구조적 모순·행과 불행·선행과 복·필요악·부익부 빈익빈 등등이다. 신학적인 것과 사회학적인 관점이 서로 복합돼 있음을 볼 수 있다.
기독교신학에서 말하는 인간은 피조물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수동적으로 태어나 생이 시작된다. 이렇듯 전적 의존상태에서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은 사회란 울타리 안에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회란 공동체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교회도 공동체의 하나로 사회성을 그 바탕으로 한다.
이런 교회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되려면 교인들을 자신처럼 돌볼 수 있는 ‘돌봄의 능력’과 교인들이 겪는 아픔을 낫게 해 줄 수 있는 ‘치유의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돌봄과 치유의 능력은 사랑이 원동력이 된다. 성직자의 길이란 이렇듯 자기 희생의 길이요 끝까지 참을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죽음까지도 맞이할 수 있는 용기의 결단이 절실히 요구된다. 거기에 덧붙여 바울처럼 하늘의 계시를 필요로 한다.
몇일 전 한 목사를 만났다. 나이 50이 넘었다. 뉴욕 플러싱에서 목회하고 있는 그 목사는 농부같은 아저씨 타입이다. 그는 한 달에 2,000달러가 넘는 렌트를 내고 2층을 빌려 목회를 하고 있다. 교회에서 나오는 헌금은 렌트로 나가고 목회사례비는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그의 얼굴은 평화와 감사로 넘쳐,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과연 그 힘이 무엇일까.
단 한 푼의 목회비도 받지 못하는 그 목사의 얼굴에 평화가 넘쳐남과, 수만 여 달러의 목회비를 받으면서도 얼굴에 평화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또 다른 목사들의 얼굴 속 희비는, 사람이 성직자가 되든 안되든 상관이 없는 듯 하다.
‘돌봄과 치유’의 삶은 반드시 목회자나 성직자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주어진 가정, 직장, 그 어느 곳에서도 요구되는 삶의 상대적 요소일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한 번 주어진 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가치는 정해지는 듯 싶다.
“신학공부를 해 놓고 왜 목회를 안하냐?”는 질문에 “아직도 사람이 되지 못해 못한다”고 한다면 ‘돌봄과 치유·계시’가 없어 못한다는 대답보다는 차라리 더 솔직한 대답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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