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에 참전했던 아버님이나 월남에 "끌려갔던" 삼촌과 달리 나는 소설을 매개로 전쟁을 "읽었다." 학창시절에 접한 전후소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황순원 선생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였다. 정찰임무에 나선 일단의 병사들이 민간인 부녀자를 겁탈한 후 살해하는 이 소설의 앞머리는 기억의 강한 휘발성을 거부한 채 아직도 내 의식의 한 귀퉁이에 머물러 있다.
얼마 전 밥 케리(57) 전 연방상원의원이 베트남전 참전 당시 20여명의 민간인을 적으로 오인해 몰살했노라고 털어놓았을 때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그림’도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숨막히는 도입부였다.
미 해군 특수부대 장교 출신인 케리는 베트남전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전쟁영웅으로 연방상원의원과 네브래스카 주지사를 지냈으며 94년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출마했다. 현재 맨해턴에 위치한 뉴스쿨 유니버시티의 학장으로 활동 중인 그는 2004년도 대선 출마를 고려중일 정도로 정치적 야심이 강한 인물이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9년 2월25일, 해군특수부대 ‘네이비 실’ 소속이었던 케리 대위(당시 25세)는 6명의 부하대원들을 이끌고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메콩강 삼각지 인근의 탄퐁으로 침투한다. 한달 전 베트남에 도착한 그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이 지역을 관할하는 베트콩 최고 지휘관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작전지역에 투입된 케리 일행은 두 차례에 걸쳐 민간인들을 살해한다. 외진 움막에 있던 2명의 남성 등 7명을 ‘제거’한데 이어 인근 촌락에서 부락민 14명을 추가로 사살한 것. 당시의 상황과 관련, 케리는 "마을로 접근하던 중 총격을 받고 응사했으나 나중에 확인해 보니 사살된 14명 모두가 부녀자와 어린이등 비무장 민간인들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작전에 참가했던 게르하드 클랜은 "케리 대위의 명령에 따라 대원들이 마을 사람들을 한군데로 몰아놓은 후 총살했다"고 주장했다. 베트콩과 내통할 가능성이 높은 부락민들을 그대로 두었다간 퇴로를 끊기기 쉽다는 판단에 따라 케리가 사살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둘 가운데 한 명은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지만, 오인사격이었건 아니건 간에 케리가 민간인을 사살했고 이것이 베트콩 21명을 소탕한 전과로 조작돼 청동무공훈장을 받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지 두달 후 케리는 또다른 임무를 수행하다 수류탄에 맞아 한쪽 다리를 잃었다.
케리가 32년 만에 ‘부분적 진실’을 털어놓은 것은 양심의 가책 때문이 아니라 수년 전부터 그의 전공확인 작업을 벌여온 뉴욕타임스가 민간인 학살사건 의혹의 전모를 공개키로 했다는 귀띔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케리가 정치인으로 입신하는 데에는 ‘전쟁영웅’이라는 그의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이런 면에서 그가 쌓아올린 명예와 권력의 피라미드는 사실은폐와 자기기만을 토대로 한 허위와 위선의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변명하려 해도 왜곡된 진실을 입신의 지렛대로 이용했다는 점은 용서받기 힘들다. 그는 자신이 받은 청동무공훈장을 반환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생사가 걸린 극한상황 속에서 군 지휘관이 취했던 선택과 행위의 정당성을 그로부터 32년 후의 현재시점에서 판정하려드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월남전 미군포로 출신으로 ‘전쟁영웅’ 대접을 받는 공화당의 잔 매케인 연방상원의원은 "베트남전을 전장터에서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은 케리를 심판할 수 없다"고 엄호사격을 가하고 나섰다. 한국전 초기에 발생했던 노근리 양민 집단학살 사건에 대해 미국 정부가 보인 반응과 어딘지 흡사하다.
이들의 주장은 특정 상황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취한 ‘선택과 행동’이 결과를 이룬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전시라는 특수상황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지닌다.
마침 이번 주말부터 ‘메모리얼데이’ 연휴가 시작된다. 달리 갈 곳을 정하지 못했다면 집에서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읽거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며 전쟁이라는 인간의 집단광기를 추체험해 보는 것도 현충일 연휴를 의미 있게 보내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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