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기사를 쓰기 위해 힐튼호텔에 갔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오랜 세월 적대 관계에 있던 그들이 요즘 어떻게 변했는지를 직접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이형철 유엔주재 북한 대사가 지난 18일 저녁 뉴저지 포트리 힐튼호텔에서 열린 코리아 포럼(KF) 회의에 초대받아 강연을 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후 미-북 관계에 긴장감이 더하고 있는 터라 북한 고위층의 실제 목소리를 듣는 것도 의미 있었다.
이 대사가 준비한 주제는 ‘우리민족의 자주적 통일문제’였다. 김일성 대학 출신에 미국과의 미사일 협상을 담당하고 외무성 미국국장, 부상을 지낸 경력이 말해주듯 그는 주체사상을 근거로 남북 통일 문제를 한치의 이탈도 없이 전개했다.
기자는 남과 북이 화해하자는 마당에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의 강연을 이해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나 강연을 들으면서 북한이 생각을 바꾸었다고 믿음을 주는 대목을 찾기 힘들었다. 특히 인민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고의 갭이 크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북한 고위층의 인식이 잘못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대사는 구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을 설명하면서 “사회주의가 인민대중을 위한 것임을 망각했기 때문”이라며 “당이 관료화하고 서방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서방의) 나쁜 피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심장이 멈춰선 것”이라고 비유했다.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는 망했지만 (북한은) 효과적으로 경제를 관리하면 성공적으로 ‘우리 식 사회주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식량난, 경제난에 대해 동구권 붕괴 후 물물교환 방식의 교역이 중단되고 좁은 땅덩어리에 홍수와 가뭄이 연속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온 인민이 ‘위대한 수령’을 중심으로 일심 단결해 난관을 견디어 낸 것은 기적이며 이젠 크게 전진할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 대사는 경제 문제에서도 주체사상의 틀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치수 대책이 실패했다던가 정책 당국자들의 잘못이 있었다는 점은 조금도 인정치 않았다. 뉴욕에서 성공한 동포들이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개인적인 소견을 말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두시간에 걸친 이 대사의 강연은 많은 의문점을 생산해냈다.
서방 자본 때문에 동구권이 몰락했다면 북한이 IMF(국제통화기금)나 ADB(아시아개발은행)등 국제기구에 가입하려고 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남한과 해외 동포의 투자를 유치하고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려고 하면서 ‘우리 식 사회주의’를 고집한다면 누가 돈을 들고 들어가겠는가. 동구권 몰락 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체코에 많은 서방 자본이 들어가고 중국이 시장을 개방, 서방 자본을 끌어들이는 거대한 역사적 조류를 북한만이 인정하기 싫은 것일까.
이 대사는 “호사스런 반찬을 차려놓고 머슴살이하는 것보다 적게 먹더라도 다른 민족과 당당하게 살아나가는 게 공화국의 기본 철학”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많이 잡으면 된다”며 사회주의 교과서를 내던지고 서방의 제도를 접목한 중국의 등소평은 당당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번 강연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 행사임에 틀림없다. 북한 대사관의 행사에 참석하거나 북측 인사를 초청하는 것이 금기 시 돼 왔던 한인 사회의 관례에 비추어 한인 단체가 사실상 북한의 주미 대사 격인 고위인사를 초청하는 일은 북측 표현을 빌리면 가히 ‘사변적’이다. 북한대사관으로서도 지난해 말부터 한인 사회와 접촉해왔고 그 연장선상에서 코리아포럼 행사에 참석한 것 같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이뤄진 남북한 화해무드가 뉴욕에서까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남북 화해는 오랫동안 쌓였던 적대 감정을 씻어내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한발 짝씩 양보하는데서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이 대사의 강연을 들으며 과거에 비해 상당한 진전이 있음을 발견했지만 동시에 서로 양보하고 좁혀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는 점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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