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잡시다" 유난히 분주했던 어느 날, 하루일과가 다 끝나 크린싱 크림으로 얼굴을 닦아내며 무심코 남편에게 한 말이었다. 남편은 하던 일을 멈추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빨리 자자구?! 빨리 자고 나서 또 뭘 빨리 하고 싶은데?" "......" 할 말이 없었다. 내가 한 말이지만 내가 생각해도 좀 심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잠마저 빨리 자자니! 아무래도 내가 ‘빨리 하기’ 중증에 걸렸나 보다.
빨리. 빨리, 빨리.
우리는 참 빠른 걸 좋아한다. 그래서 동작이 빠른 사람을 묘사할 때는 ‘민첩하다’ ‘시원스럽다’ ‘신속하다’ ‘빠릿빠릿하다’ ‘재다’ 등의 긍정적인 표현을 쓰고, 동작이 느린 사람에게는 ‘느려 터졌다’ ‘굼뜨다’ ‘답답하다’ ‘더디다’ 등의 부정적인 표현을 쓴다. 현대사회는 더 빨리 보고, 더 빨리 정보를 얻고, 더 빨리 프로그램을 만들어 더 빨리 반응하기를 원한다. 빠르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가속이 붙어 더 빨리 움직이도록 강요받거나 스스로 그렇게 적응한다. 게다가 우리 민족성이 유난히 빠른 것과 남보다 앞서 가는 걸 좋아하니, 현대에 사는 우리 한인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몸과 마음이 따로 따로 이다. 몸은 현재에 있고, 마음은 늘 서너 걸음 앞서 가있다.
이렇게 빠른 것을 선호하는 시대에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을 내어 주목을 끈 학자가 있다. 프랑스의 사회 철학자 피에르 쌍소. 그가 쓴 책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1999년 프랑스에서 최대의 화제작으로 논픽션 부문 1위였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반응이 좋아 금년 초에 비소설 부문 3위를 차지했었다.
쌍소는 그의 책에서 ‘느림’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리지 않으면서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는 능력’이라고. 느리게 산다는 것은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라고 한다. 느림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문제이며, 우리를 서두르게 하는 이 사회 안에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절실한 과제라고 그는 말한다.
느림의 삶은 우리에게 한결 같은 평안함을 보장해 준다고 믿는 그는 이 책에서 몇 가지 구체적인 제안을 한다. 한가로이 거닐기, 잘 듣기, 꿈꾸기, 기다리기, 글쓰기 등 대부분이 수긍이 가는 제안인데, 한가지 제안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권태를 느껴보라는 것이다.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사소한 일들을 소중하게 인정하고 애정을 느껴보라고 권한다. 예를 들면, 아무런 할 일이 없거나, 그리 급할 것도 없는 일을 잠시 뒤로 밀쳐놓을 수 있을 때, 느긋한 행복감에 젖어서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며 만족스런 하품을 해댈 수 있는 권태를 가져 보란다. 때때로 그런 권태에 빠져들 수만 있다면, 하나도 급할 것 없다는 기분으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가까이 다가가고, 그 세상을 성실하게 누리고, 다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랬다가 다시 돌아가 세상의 새로운 맛을 더 잘 느끼기 위해 권태 속에 가끔 자신을 맡겨보라는 것이다. 그럴 것 같기도 하다.
그가 권하는 ‘느린 삶’이란 결국 한 순간,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적인 일이라도 해치우는 식으로 하지 말고, 애정을 갖고, 제대로 완성하고 살라는. 피천득 시인의 ‘이 순간’에서처럼.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 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정녕, 이 순간만이 내게 확실히 주어진 시간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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