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시아(Artesia)에 있는 원베드 아파트에서 더글러스 신 목사는 고향을 탈출해 나온 북한주민들에게 현대판 지하조직 노선을 구축하는 것을 돕고 있다.
전세계의 거의 반에 걸쳐 조직망을 갖고 있는 인권단체와 연계하여, 신목사는 아시아에 숨어 지내고 있는 북한인 75명이 남한에서 자유를 얻어 살 수 있도록 도왔다. 그와 다른 인도주의자들의 이같은 노력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사회중에 하나인 북한에 기근이 엄습한 이래 6년동안, 대략 3만명에서 10만명의 북한인들이 목숨을 걸고 중국으로 탈출을 감행했다고 인권단체들은 주장하고 있다.
신목사는 자신의 이같은 노력을 21세기에 노예처럼 갇혀 지내는 사람들을 자유의 땅으로 탈주시킨다 하여 `’엑소더스 21’라고 표현한다.
“북한은 거대한 강제 포로 수용소입니다." 라고 1997 과 1998년에 북한을 방문했던 신씨는 말하였다.
북한주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고 있는 탈주로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의 동북부 지역으로 숨어드는 길이다. 거기에서 신씨의 협력자들이 다른 인권단체와 기독교 그룹들과 함께 북한 난민들을 안내해 은신처와 음식을 제공해 준다.
일부 북한 난민들은 조선족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중국 동북부 지역에 친척이나 친구가 있으면 그곳에서 임시 거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체류가 불법이기 때문에 체류사실이 알려지면 그들은 체포돼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고 있다.
신목사와 접촉을 통해 일부 난민들은 비교적 정치적으로 자유로은 몽고로 탈출한다. 그곳에서 운이 좋은 일부 북한 난민들은 신목사가 서울과 연락해 한국으로 가기도 한다.
인터넷과 전화를 통해 신씨는 전 아시아와 매일 연락을 취하고 있다. 그는 그가 도와 준 북한 난민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대단히 기뻐한다.
아들 Joseph이 2년 전 위급한 상태에서 제왕절개수술로 태어났을 때 처음엔 그의 심장이 뛰지 않았던 일을 회상하면서 “마치 나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와 똑같은 기쁨을 느낍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서울태생의 신목사는 현재 하고 있는 이 일도 마치 거의 생명을 잃은 사람들에게 새 새명을 주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은 그의 직업이 마치 복음선교운동을 하는 Calvary Chaple 의 선교사 인 것을 반영이나 하듯이 종교적인 은유로 가득차 있었다. 매주 일요일 그는 한인타운에 있는 장로교회인 더 그레이트 비션 처치 어브 로스앤젤레스(the Great Vision Church of Los Angeles)에서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을 위한 청소년 목회를 하고 있다.
46세인 그는 20세 때 가족과 이민, 5년전 목사안수를 받기 전까지는 영화제작과 개인 사업에 종사했다.
북한 난민들의 상태는 한때 동남 아시아의 `보트 피플`(boat people)이 직면했던 상황보다 더 절박하다고 신목사는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난민들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비참하고 또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는 지가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한달 후 쯤에는 이러한 상황이 달라지리라 그는 희망하고 있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있는 위원회의 대표들이 1천만명이 서명한 3톤 가량의 탄원서를 뉴욕에 있는 UN 사무총장에게 제출하게 된다. 이 탄원서는 북한 탈주자들에게 난민지위를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다.
신목사가 난민문제에 깊이 관여하게 된 것은 1990년대말 중국과 북한을 방문한 후 부터 였다.
조찬모임에 형성된 단체
LA로 돌아 온 후 그는 코리안 아메리칸 변호사로서 인권 운동을 하는 대단히 교제범위가 넓은 Hyong S. Koh씨를 알게 됐다.
그들은 인권 변호사 Judith Wood씨를 만났는데, 그는 그의 친척이 아우슈비츠수용소를 탈출한 경위를 들으면서 자란 구세주의 유대인이었다. 세 사람은 아침 식사를 하면서 Exodus 21을 구상했다.
그들은 피난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아시아에 한 기지를 설치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몽고가 지리적으로 가깝고, 풍요로운 토지 그리고 외지인에 대한 자유방임적인 태도 때문에 선택됐다.
2000년 1월에 신목사는 몽고를 향해 출발했다. 몽고 동쪽에 있는 Sumbre 지방에 지역 군인들의 도움으로 원형의 텐트인 yurt 를 설치하고 `The Great Vision Church of Los Angeles’ 라고 쓴 깃발을 달았다.
텐트와 몽고의 수도 Ulan Bator을 왕래하면서 신목사는 난민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었고 은신처도 찾아 주었다. 주 2회 서울행 비행기가 출발하는 Ulan Bator에 거주하고 있는 1,000명의 한인 중 일부를 포함해 여러 방면으로부터 도움의 손길이 도래했다.
LA에 있는 Exodus 21의 재정적 후원자들은 the Great Vision Church, 변호사들, 익명의 기부자, 그리고 신목사의 이웃에 살고 있는 한 할머니 등이었다.
신목사의 도움을 받은 사람 중에는 북한 당원인 이씨가 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활동하고 있을 동안 남한 사람, 코리안 아메리칸과 선교사들과 사귀게 되었고 성경을 공부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조국을 떠나 외국에서 지내다보니 북한이 견딜 수 없는 곳처럼 생각됐습니다."고 말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 온 후 얼마 안돼서 그는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그곳에서 한국에 살고 있는 아저씨와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실패하였으며 북한으로 돌아오자마자 정치범으로 감금되었다.
그는 2년전 화장실 사용하는 시간을 틈타 7개의 감옥담장을 넘어 탈출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부인에게 같이 북한을 탈출하자고 했으나 부인은 거절했다.
그는 부인과 2명의 어린 자녀를 북한에 남겨 두고 중국으로 다시 왔다. 그는 생계를 인권단체 종사자들과 전도사들에 의지하면서 숨어서 지냈다.
신목사가 이씨를 돕기 시작한 것은 그가 중국에서 몽고로 출발하려 할 때였다. 신목사는 중국으로 가서 은신처에서 그를 만나 옷과 돈을 준 다음 각각 다른길로 출발하였다.
이씨는 몽고까지의 1000 마일을 기차,자동차 그리고 걸어서 갔다. 국경 수비대를 피하기 위해 때로는 걸어온 길을 되돌아 가 발자국을 지웠다.
몽고로 건너 간 후, 그는 정화조에 하루동안 숨어 지냈으며, 그때 낡은 옷을 버렸고 다시 출발 전에 신발을 땅에 묻었다.
몽고에서 선교사와 접촉을 시도하며 일주일을 보낸 후 이씨는 다시 신목사와 접촉이 되었다. 여러달 동안 이씨는 신목사와 그리고 목사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다른 피난민과 함께 Ulan Batord에서 생활했다.
서울과의 접촉을 통해 신목사는 통일부장관에게 성공적으로 그의 귀국신청을 접수시켰다. 이씨는 1월에 서울로 갔으며 그곳에서 현재 북한 탈출자들이 남한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수개월 기간의 재교육을 받고 있다. 남한의 법에 의하면, 북한인은 자동적으로 시민권이 주어진다.
서울로 온 또 다른 북한 탈출자는 북한 사람들의 매일 매일의 생활은 대단히비참하며, 외부에서는 아무도 그 상황을 추측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어머니들은 배가 고파 음식을 달라고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을 오히려 때릴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신목사의 도움으로 남편과 두 아이들과 함께 서울로 온 H.이씨는 말한다.
“줄 음식이 없기때문에 자기자식을 세차게 때리지 않으면 안되는 어머니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읍니까?" 라고 그녀는 물었다.
굶어죽는 사람이 수백만명에 달하고 있다는 보도
1996년 이래 북한에서는 200만명 이상의 남자,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이 정부의 잘못된 농업정책으로 인하여 굶어 죽었다고 믿어진다.
유엔 식량국 보고에 따르면 보통 북한주민의 일일 음식 배급량은 약 5 온스의 곡식이다. 어머니들은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야생의 뿌리나 풀을 섞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심각한 위장 장애를 야기시킬 수 있다.
이씨는 일부 가족은 자신의 자식을 시장터에 버려 그들이 구걸하거나 도둑질이라도 해서 연명할 기회를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일부는 중국으로 가기도 한다. 꽃제비 혹은 “flower swallows” 로 알려진 젊은이들은 누더기로 된 옷을 걸치고 음식을 위해 중국의 북동부 지역의 거리들을 배회한다.
이들은 국경수비대들의 눈을 피한 후에도 북한 탈출자들을 정기적으로 체포해 본국으로 송환시키는 중공 관리들도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52세 된 한 난민은 북한 당국에 인도된 후 심문받는 동안 그의 두 개골과 한 쪽다리가 부서졌다고 인권단체 종사자에게 말했다.
인권단체들은 대략 10만명 이상의 북한주민들이 숨어 지내는데 중국이 가장 많고 그외에 몽고, 러시아,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미안나,태국 등이라고 말한다.
중국에 사는 북한 주민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한 이주자` 로 분류되어 국제법상 난민들에게 보장되는 도움을 받을 자격을 부여 받지 못하고 있다.
LA에 있는 인권 연구 프로젝트의 간부인 Wood씨는 중국에 있는 북한 주민도 정치적 난민임에 틀림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단체는 UN 난민고등판무관을 설득하여 몽고에 있는 북한 난민을 위한 사무소 개설을 희망한다.
그들이 난민의 지위를 부여 받는다면 임시 센터가 설치되어 그들이 남한 혹은 타국으로 갈 수 있도록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북한난민들을 돕기위한 국제위원회의 사무총장이며 전 서울시장인 김상철씨는 말한다.
100만명 이상의 코리안 아메리칸 중에서 50% 정도는 그들의 뿌리가 북한이므로 북한 난민들은 이곳 한인들로부터 후원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인권단체 관계자들은 말한다.
신목사는 12월에 몽고에서 LA로 돌아 온 후 계속해서 Exodus 21의 복잡한 운영 및 실천 계획을 지시하고 있다. 가끔 전화벨 소리에 그는 잠에서 깨워 일어난다.
“4 명이 국경을 넘어 몽고로 성공적으로 건너 갔습니다." 라고 한 사람이 신씨에게 전화했다.
2백만 마리의 양들이 살고 있고 사람은 오직 7만명 뿐인, 원시시대를 연상시키는 자연 그대로의 풍치를 갖고 있는 몽고에 난민 은신처를 세우는 꿈을 신씨는 갖고 있다. 한국과 몽고민족은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형제의 관계를 가져왔다.
“그것은 그들의 땅에 정착을 허용한 데 대한 댓가로 그들에게 필요한 농작물 경작을 도와줄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좋은 협조관계가 될 것입니다."라고 신목사는 말했다.
아내와 두 자녀들과 함께 거주하는 비좁고 갑갑한 아파트에서 신씨는 북한주민들의 구조를 위해 기도한다. 24시간 휴식없이 일하고 있는 그는 “나머지는 하느님의 뜻에 맡깁니다."고 말한다.
참조:한 목사가 중국으로 탈출한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에서 은신처를 찾을 수 있도록 매일 인터넷과 전화를 통해 해외와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카니 강
로스엔젤레스 타임스에서 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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