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있는 조연들이 드라마를 살린다. 어떤 드라마에선 조연의 인기가 주연의 인기를 능가한다. 시청자가 주연에게 쏟는 관심은 대부분 뜨겁지만 순간적이고, 조연에게 쏟는 사랑은 은은하며 오래간다.
"대패댁! 뭔 일인가 말을 해야 알 것 아니여! 평소에는 말 못해 죽은 귀신처럼 말을 많이하더니만." 20일 오후 SBS 탄현 스튜디오 일일극 ‘소문난 여자’ 녹화장에서 이서방 역의 정원중이 울고 있는 아내에게 투박하게 말을 건넨다.
한번의 NG없이 연출자 성준기 PD의 OK 사인이 난다. 정원중처럼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조연의 활약으로 드라마의 인기가 상승하고 있다.
’멋진 친구들’ (KBS)에서 ‘조연의 지존’ 으로 불리는 임현식의 푼수 연기가 돋보이고, ‘어쩌면 좋아’ (MBC)에선 조연으로 나오는 강석우 박영규의 능청스러운 연기대결이 불꽃을 튄다.
조연의 경연장이라 할 만한 ‘소문난 여자’ 에선 김지영 정원중 권해효 이미영이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호텔리어’(MBC)의 최화정 허준호의 코믹 연기는 주연 배용준 김승우의 연기보다 더 사랑받고 있다.
이뿐 아니다. 요즘 방송 초반 고전하던 ‘비단향 꽃무’ 도 박광정의 비굴한 회사원 연기와 명계남의 잔혹한 사장 연기가 조화를 이뤄 시청률을 끌어올리고 있다.
’태조왕건’(KBS) 의 책사 역 김갑수 전무송, ‘아직도 사랑해’(SBS)의 박원숙 반효정 등의 연기도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다.
방송가에선 ‘조연이 떠야 드라마가 성공한다’ 라는 말이 나온다. KBS 윤흥식 주간은 "주연 캐스팅하는 것보다 조연 캐스팅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고 털어 놓는다.
1960~70년대 문오장 박주아 김순철, 80년대 박원숙 김수미 전원주 김상순 임현식 주현 최주봉 최종원 명계남 등의 뒤를 이어 90년대와 요즘 떠오르고 있는 조연 연기자는 조재현 정원중 박광정 권해효 박상면 조은숙 등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연극무대나 학생 때 다진 연기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연출하는 것이 공통점이다.
’옥이 이모’ ‘은실이’ 등에서 많은 조연들을 스타로 배출한 성준기 PD는 "요즘 시청자는 예전과 달리 단순한 스토리나 단선적인 캐릭터에 쉽게 식상해한다.
드라마의 다양한 내용과 재미, 개성을 표현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조연의 활용이다"고 말한다.
변화된 시청자의 욕구가 조연들의 각광 받게 하는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조연이 예전보다 관심을 끄는 현상은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있다. 사람들은 권위주의 사회와 경제적으로 궁핍한 시대에는 권력과 부, 미모를 완벽하게 갖춘 주연들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요즘처럼 사회가 다양해지고 여유가 있을 때는 실수도 하고 약점도 있으며 인간적 체취가 우러나는 조연에게 동일시의 감정을 느끼며 즐거움을 맛본다.
정형화한 가치와 규범이 무너지면서 개성을 중요시하는 분위기와 자신이 만족하는 일을 하며 살려는 사람들의 가치관도 조연의 인기 현상과 관련이 있다.
전문가들은 "절대가치나 이념, 영웅적 인물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시대는 지났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맡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드라마에서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는 주연보다 개성이 드러나는 조연이 시청자의 취향과 기호에 맞는다" 고 말한다.
"스타는 사라지지만 조연은 평생가요" ■조연 40여년 김지영씨
"스타는 저녁에 떠 아침이면 사라지지만 조연 연기자는 평생 간다."
40여년 조연만을 해온 탤런트 김지영씨(64)의 버팀목이 된 말이다. 그는 시대극, 사극, 현대극 등 장르를 넘나드는 폭 넓은 연기를 한다. 또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등 각 지방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탤런트이기도 하다.
녹화가 없는 날은 시장에 들러 사투리도 배우고 시장 사람들의 생활을 본다. 조연 연기자는 어느 캐릭터를 맡아도 소화할 수 있게 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악극단, 충무로를 거쳐 드라마 연기자로 자리 잡은 그는 "줄타기, 노래, 연기 등 모든 것을 잘하는 광대가 진짜 연기자라는 말을 선배들에게 듣고 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려 노력했다"고 한다.
시청자들의 사랑이 젊은 주연들에게 쏟아지는 것을 지켜보며 조연으로서 좌절도 많이 겪었다.
그러나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연기 잘하는 조연들에게 관심을 쏟는 것을 보고 "40여년의 조연 인생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젊은 연기자들 중에는 상당수가 흉내내기에 급급하다는 그는 "대본에 나온대로 연기를 할 것이 아니라, 대본을 가슴에 넣고 감정과 대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연기해야 한다" 고 일갈하고는 ‘소문난 여자’ 의 녹화장으로 향했다.
배국남기자 knb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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