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뉴욕에 반가운 손님이 다녀갔다. 소설가 이문열씨다. 이번에 하이페리온 출판사가 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3일간의 바쁜 뉴욕 일정에 틈을 내 뉴욕문화원 및 미국대학 행사에도 참여했다.
두말 할 것 없이 이문열씨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소설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발간되는 즉시 밀리언 셀러 행진을 계속하고 있으며, 프랑스 영국 등 유럽에 이어 이제 미국에서도 그의 작품들이 번역 출판되고 있다.
이문열씨는 97년 발표한 작품 ‘선택’으로 한국 여성운동가들로부터 집중포화를 받은 작가이다. 지난 17일에 있었던 코리아 포럼 강연회에서도 한 여성이 이 문제에 대해 질문했는데, 이문열씨는 당혹스럽다면서, “지금 시대는 남성들만의 힘으로는 이끌어갈 수 없는 시대 아닙니까? 여성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고 여성의 역할론을 명쾌하게 피력했다.
그래서 그런가. 이문열씨를 볼 때마다 나의 시선은 항상 한 발짝 뒤에 서 있는 그의 아내에게로 가게 된다. 이번 뉴욕 방문 길에도 그의 부인은 늘 한쪽 자리에서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에 옥양목같은 담백한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었다.
작가의 탄생은 고통 뒤에 이루어지는 피의 결정체일 것이다. 그 어려운 통과의례를 겪는 동안 그의 아내가 넘었어야 할 산은 또 얼마나 높았을 것인가. 간혹 숨죽이며 지나야 했던 어둠의 터널은 또 얼만큼 캄캄했을까.
이문열씨는 오래전 자기집 된장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옛날된장 뚝배기 맛을 아내가 이제는 물려받았노라고. 아내에 대한 은근한 외경까지 포함해서 아내의 밥 이야기를 어눌하게 풀어나갔는데, 나에게는 그의 어느 소설 보다도 그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다.
그는 글을 쓰다가 한밤중에 반드시 밥을 먹는다고 한다. 밤참이니까 대충 라면 정도로 때우는 게 아니라 금방 새로 지은 밥에 반찬이 다 갖추어진 정식 밥상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상엔 반드시 된장뚝배기가 올라와야 한다는 것이다. 간혹 친구들이 함께 밥상에 앉으면 된장에만 손길이 가더라고 너스레를 떠는, 그런 이야기를 할 때의 이문열씨 표정이 얼마나 천진했던지 나는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다.
밤에도 정식 밥상을 대령해야 하는 이들 부부에게 여권논쟁이 제기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의 부인은 남편 뒷수발을 하며 살지만, 언제 봐도 그것에 대해 억울해 하는 기색이 없다. 언제나 자신의 위치에서 위엄을 가지고 가사를 돌보는 듯하다. 이문열씨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자연스럽고 다정하게 아내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참으로 절묘하게 가정에서 역할 분담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운영하는 부곡선원에 있는 그의 집 거실 복도를 가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워하곤 한다. 복도 양쪽에 빼곡이 전시되어 있는 우리나라 전통자수 작품들 때문이다. 비단에 수놓은 여인들의 주머니며 골무, 베갯잇, 댕기까지 온갖 수예작품들이 긴 두 벽을 가득 채우고 있고, 복도 가운데에 놓인 유리상자에도 전시되어 있다. 부인에게 그 내력을 묻자 “남편이 소설 쓸 때 혼자 자기가 미안해서 방에서 수를 놓았어요.”하면서 “작품이 준비되면 남편이 전시회를 열어 준대요.”하고 수줍게 속삭였다.
거실 아래층 부인의 작업실에는 멋진 동양화 한 폭이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수틀과 가지각색의 수실들, 가위들이 예쁜 바구니에 여러 개 담겨 있는 그 작업실은 동화나라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꿈이 생산되는 공장이었다. 남편이 원고지 앞에서 지난한 통과의례를 거치는 동안, 그녀는 수실을 한 뜸 한 뜸 수 놓았을 것이다.
맛을 아는 사람은 인생을 안다. 인생을 아는 사람은 사랑을 안다. 이문열씨의 부인이 남편의 입맛에 맞는 된장을 끓일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가 자수의 세계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한 덕분이었다.
삼일간 뉴욕에서 바쁜 일정을 보내는 이문열씨를 보면서 뒤늦게 부인의 지고지순한 사랑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서의 권위보다는 따뜻한 눈길로 아내를 보듬어 안아주는 남편의 진실성도 가슴에 와 닿았다.
아내로서의 역할과 자기 내면 세계를 슬기롭게 운전해가고 있는 그의 아내는 어쩌면 그가 쓴 또 하나의 감동적인 소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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