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밀레니엄 기행 (14) 라틴아메리카를 가다
▶ 아르헨티나 <중>
한인 커뮤니티 어제와 오늘 백구라는 우리말 뜻을 생각하면 백구를 쳐 머리를 빡빡 민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나, 흰 개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라고 상상하겠지만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백구촌은 브라질에 이어 남미 최대의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인촌의 별명이다. 그 이유는 그 지역이 백구번 버스의 종점이기 때문이다.
65년 농업이민으로 시작된 아르헨티나 이민은 한국과 전혀 다른 농업환경적응에 실패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몰려들어 판자촌에 거주하다가 교통이 편하고 판자촌보다는 나은 서민층 연립 주택단지가 있다는 이유로 이 지역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내수공업의 형태로 현재 한인 커뮤니티의 젖줄이 된 의류산업의 기반을 만든 역사 깊은 곳이다.
온세 - 아베자데다 의류상가이제는 많은 한인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좋은 동네를 찾아 많이 주거지를 옮겼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한인들이 살고 있고 음식점, 식품점으로부터 노래방, 비디오 가게에 이르는 다양한 한국 상점들이 모여 있어 아르헨티나의 한인타운의 위상을 지켜가고 있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엘에이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여기저기 한글 간판이 들어서 푸근한 느낌을 주고 아르헨티나 정부가 준 차에 한글로 ‘방범’이라고 쓴 작은 흰색 방범 차를 볼 수 있다.
옷가게 1,000개, 월세 9천달러백구촌이 한인촌이라면 한인들이 주로 종사하고 있는 의류 상가지역은 주로 온세와 아베자데다 지역. 당초 한달 월급을 주고도 옷 한 벌을 사기 어려울 정도로 옷값이 비쌌던 아르헨티나의 옷 사장에 뛰어들어 특유의 근면함과 두뇌에 힘입어 한인 커뮤니티는 아르헨티나에 싸고 좋은 옷을 대량 공급하여 옷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아르헨티나의 옷 시장을 장악했다. 이 두 지역에 모여 있는 한인 옷가게는 1,000개에 달하며 권리금 20만달러에 월세 9,000달러를 호가하는 곳이 즐비하다.
실물경제 회복 시간걸려그러나 한인 비즈니스 역시 아르헨티나의 불경기로 고통을 받고 있다. 과거의 초인플레 시절도 힘이 들었지만 그 당시는 인플레에 맞추어 그 만큼 빨리 뛰면 따라갈 수 있었다면 현재는 매기가 없어 아무리 뛰어봐야 소용이 없고 개스실에서 서서히 질식당하는 기분이라는 것이 아르헨티나 한인사회를 연구하는 재아한인 이민문화연구회를 이끌어온 손정수(57)씨의 설명이다.
다행히 외채연장 협정이 최근 순조롭게 이루어져 외자가 들어오기 시작해 산소가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금융경제의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는 것이 실물경제의 회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직 낙관은 이르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경제의 전반적 불황 이외에도 한국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볼리비아 출신들이 한국 가게에서 배운 노하우를 가지고 나가 벼룩시장 등에서 싼 가격으로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것도 한인 비즈니스의 불황의 또 다른 이유이다.
세계에서 가장 푸짐한 한식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경기가 나은 멕시코 등으로 떠나면서 한때 4만명에 달하던 한인 커뮤니티는 현재 3만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먹는 장사는 밥은 안 굶는다"는 생각에 너도나도 요식업에 뛰어들어 식당수가 근 100개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식당 난립과 과당경쟁의 결과는 아르헨티나 특유의 식당 문화. 즉 각 식당에 메뉴가 사라지고 일정액에 있는 것을 다 내주는 초호화판 단일 메뉴제가 자리잡은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미주 대륙, 아니 세계 어디에서도 같은 값에 가장 푸짐한 한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아르헨티나의 경제병90년대 초 노태우 시절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한국 언론들은 한국 경제의 미래와 관련해, "일본인가, 아르헨티나인가"하는 특집을 연이어 연재한 바 있다. 최근 다시 경제와 어려워지자 한국 언론들은 대처의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소위 영국병을 탈피한 영국을 예로 들어 "영국인가, 아르헨티나인가"라는 특집을 잇달아 내보내고 있다. 왜 이처럼 아르헨티나는 실패한 경제의 전형으로 인용되고 있고 소위 ‘아르헨티나의 병’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인가?
아르헨티나는 전통적으로 소수 지주들이 지배하는 전형적인 농업국으로 농산물을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입해 왔다. 그러나 1, 2차 대전이 터지면서 미국등 선진국과의 경제 교류가 단절되자 민족적인 산업가들은 독자적인 수입대체 산업화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지주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도시의 노동자들과 연대해 복지정책 등 진보적 정책을 펴나갔다. 그것이 에비타로 상징되는 일종의 포퓰리즘인 페론 대통령의 ‘페론주의’이다. 수입대체 산업화, 그리고 전쟁 특수에 힘입어 1940~50년대 아르헨티나는 경제 10대국에 돌입했다. 금을 중앙은행 금고에 다 보관할 수가 없어 사무실에까지 보관해야 했고 대리석으로 도로를 깔 정도였다. 그리고 대통령이 나서 "국민들이 원하면 금으로 길을 깔 수도 있다"고 큰 소리를 쳤다.
그러나 60년대 들어 아르헨티나의 기적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수입대체 산업화가 한계에 부딪치면서 외환 부족, 경제 침체에 고인플레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노조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고인플레를 보상하기 위한 임금인상이 뒤따를 수밖에 없어 인플레의 악순환은 계속됐다.
소위 아르헨티나의 병이 발발한 것이다. 경제 위기는 결국 쿠데타로 이어졌고 군부는 노동자들을 때려잡고 시장개방을 통해 다국적 기업을 들여와 경제성장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외채위기라는 또 다른 경제위기만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경제위기, 특히 초인플레를 해소하기 위해 민주화 2대 대통령인 메넴은 91년 아르헨티나화와 달러를 1대1로 묶고 살인적인 긴축정책을 펴나가는 혁명적인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그러자 고질적인 인플레는 자취를 감추고 물가안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만성적인 불황과 중산층의 몰락, 사회적 양극화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세계경제의 뇌관이라는 평을 받아온 외채의 경우 최근 외채연장에 성공했지만 현재 남미 주요 국가중 가장 경제가 엉망인 아르헨티나가 언제나 만성적인 불황을 벗어나 정상궤도에 오를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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