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밀레니엄 기행 (13) 라틴아메리카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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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민주화 운동의 전범-5월 어머니회"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다오"
남미에서 가장 코스모폴리탄한 도시로서 ‘남미의 파리’라고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심지 5월 광장 뒤에는 영화 ‘에비타’에서 ‘아르헨티나의 국모’ 에비타 페론 역을 맡은 마도나가 발코니에 나와 열광하는 서민들에게 답례를 하던 분홍색의 대통령궁이 자리잡고 있다.
남미여행을 준비하면서 원래 목요일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낼 수 있도록 일정을 짜려고 했다. 그 이유는 아르헨티나 민주화 운동의 상징, 아니 남미, 나아가 세계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서 광주 5.18 민중항쟁과 관련해 한국에도 초대된 바 있는 5월 어머니회가 아르헨티나의 민주화가 이루어진지 근 20년이 되가는 지금까지도 한번도 빼놓지 않고 매주 목요일 정확히 오후 3시가 되면 이 곳에서 군사독재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 여행 일정상 일요일에야 이 곳을 찾을 수 있었다.
7년간 실종자 3만여명작은 인구에 광활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이라는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역시 다른 라틴 아메리카들과 마찬가지로 잦은 군사독재를 겪어야 했다. 특히 83년 영국과의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배해 권력을 물려준 마지막 군사정권은 1976년부터 7년 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독재 인사들을 상대로 소위 ‘더러운 전쟁’을 수행해 무려 3만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민주화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후 집권한 문민정부들은 군부의 영향력을 무서워하여 이들의 인권탄압 사례에 대해 포괄적인 사면조치를 취하고 맘으로써 이들의 반인류적 범죄행위는 처벌을 받지 않은 채 민주주의의 사각지대로 남겨져 왔다.
20년째 매주 목요일 시위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 군사독재의 인권탄압에 저항해 5월 광장에서 매주 항의집회를 엶으로서 아르헨티나 민주화의 기폭제를 제공했던 실종자, 정치범의 어머니들의 모임인 5월 어머니회는 이 같은 역사 왜곡에 항거해 줄곧 저항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최근 이 같은 사면조치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얻어냈다. 즉 군사독재에 대한 처벌의 문을 연 것이다.
일요일 아침의, 그것도 미국과 정반대의 절기로 바캉스 시즌 일요일 아침의 5월 광장에는 거의 인적이 보이지 않은 채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들만이 한가롭게 붉은 광장 타일에 앉아 먹이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비둘기 사이로 눈에 띈 것은 광장 바닥에 하얀 페인트로 그려진 커다란 원을 따라서 연달아 그려진 하얀 그림들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해 자세히 가서 보니 머리에 두르고 목 부분에 매듭을 진 스카프 모습이었다.
시위 때면 어머니들이 항상 목에 매고 나와 5월 어머니회의 상징이 되어버린, 군사독재가 가장 무서워하던 ‘공포의 하얀 스카프’였다. 그리고 5월 광장에서 대통령궁으로 향하는 길 역시 실종자들을 상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길바닥에 하얀 페인트로 그려져 도열을 하고 있었다. 이 모두는 아르헨티나의 민주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체발굴 - 보상등 거부세계 각국에 수많은 민주화 단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5월 어머니회가 유독 주목을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물론 그 이유는 소위 민주화 이후 투쟁성이 사라져버린 대부분의 민주화 단체들과 달리 5월 어머니회는 민주화 이후에도 한결같이 투쟁의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5월 어머니회가 지금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그 강령의 놀라운 내용이다. 그 내용이란 5.18 광주 민중운동단체를 비롯한 세계의 많은 민주화 단체들과 달리 사체 발굴, 금전적 보상, 기념물 건립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우리의 자식들은 죽은 것이 아니고 현재의 민주화 운동 속에 살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체 발굴을 거부한다. 모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젊은이들이 모두 우리 자식들이다.
둘째, 우리는 어떠한 기념물 건립도 반대한다. 기념물 건립은 우리 자식들의 민주화 투쟁 정신을 화석화시켜 건축물과 돌 속에 가두는 것이다. 우리 자식들의 정신은 기념물이 아니라 현재의 투쟁을 통해 기념되고 계승되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어떠한 금전적 보상도 거부한다. 생명은 생명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지 어떠한 금전으로도 대치될 수 없다. 금전적 보상은 인간의 생명을 금전으로 격하시키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끄러운 한국 민주화 운동이 같은 5월 어머니회의 강령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그 숭고한 정신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숙연함을 넘어 5.18 광주 민중항쟁을 비롯한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 뼈아픈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개인적으로 5.18 단체 관계자들과 유럽과 아시아의 민주 성지를 돌며 기념사업에 대한 조사도 하고 여러 면에서 개입을 했지만 5.18 광주 민중항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김대중 정부 들어 정신은 잃어버린 채 화석화되어 버렸다.
5.18 묘역은 망월동의 초라하지만 정신이 넘치는 역사적 유적으로부터 수백억원이 들어간 화려하고 거대한 묘소로 옮겨졌지만 그만큼 웅장한 기념물에 갇혀 정신은 사라져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5.18 피해자들에게 주어지는 거액의 보상금을 타기 위해 가짜 피해자들이 나타나 돈을 챙긴 것들이 뒤늦게 밝혀져 처벌을 받기까지 했다. 이제는 변해 버렸지만 한때 한국을 대표했던 저항시인 김지하는 ‘구리 이순신’ 박정희 시절 친일파 박정희가 민족의 영웅 이순신의 동상을 매우 위압적인 모습으로 청와대의 수문장처럼 청와대를 뒤로 하고 국민들을 내려다보도록 건축한 것을 풍자한 바 있다.
이순신이 나와 "나는 국민과 함께 하는 인자한 모습인데 나를 구리동상 속에 가두었다"고 "나를 구해달라"고 신음하는 이야기이다. 사실 이제 구리동상 속에 화석화된 5.18을 비판하는 ‘구리 5.18’이 필요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5월 어머니회의 하얀 스카프는 고인 물은 썩을 수밖에 없듯이 민주주의 역시 지속적인 투쟁이 없이는 정체될 수 없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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