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밀레니엄 기행 (10) 라틴아메리카를 가다
▶ 칠레 <상>
’박격의 칼’ 가는 피노체 세력"인간 백정을 구속하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는 많은 유가족들이 경찰 저지선을 뚫기 위해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인간백정은 이제 칠레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누구를 말하는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거의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말로써 이제는 실각한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를 말한다.
칠레는 ‘남미의 영국’이라고 불리는 유럽적 문화, 주산업인 구리광산의 열악한 노동조건, 인디오를 거의 멸종시킴으로써 계급문제를 중화시켜줄 수 있는 인종문제의 부재 등으로 인해 남미에서 가장 유럽식의 계급정치가 발달한 나라이다. 그 결과 1970년대 초 남미에서 최초로 공산당이 선거에 의해 집권했다. 사회당 등과 좌파 연합을 구성해 선거에 승리한 공산당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미국기업이 독점해온 구리광산을 국유화하는 한편 과감한 개혁을 펴나갔다.
상전까지 죽인 군부 심복이에 미국은 최근 해제된 비밀문서가 입증해주고 있듯이 중앙정보부(CIA)를 통해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쿠데타 지원에 나섰다. 이 같은 미국의 공작에 의해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 아옌데 대통령이 신임하여 육군 참모총장에 앉힌 피노체였다. 그리고 아옌데는 피노체가 동원한 전투기의 대통령궁 폭격과 탱크부대의 포격 속에서 저항하다 목숨을 잃어야 했다.
권력을 장악한 피노체는 정치영화의 대가인 코스타 가바스 감독의 ‘실종’(Missing) 등 여러 영화가 영상화했듯이 남미 현대사에게 가장 잔인한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수만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고 수십만명이 망명을 떠나야 했다. 칠레 저항음악의 상징이었던 빅타 하라는 축구장에 잡혀와 함께 잡혀온 정치범들을 노래로 격려하다 그 자리에서 사살 당해야 했고,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남미의 대표시인 파불로 네루다 역시 쿠데타의 충격에 쓰러져 숨을 거둬야 했다.
테러단 파견, 반대파 제거종신 대통령이 된 피노체는 이후에도 철권통치로 칠레사회를 공포로 몰고 갔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어느 날 갑자기 끌고 가 죽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워싱턴에 망명 중이던 아옌데 시절의 전 미국대사를 대낮에 폭탄테러로 죽이는가 하면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도 테러단을 보내 반대세력을 제거했다. 특히 워싱턴 사건은 미국 땅에서 발생한 최초의 테러사건으로서 미국 정부의 비호로 오랫동안 법적 심판을 피해 왔지만 결국 피노체의 발목을 잡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라고스 좌파정권 집권80년대 민주화 물결이 칠레에도 밀어닥치자 국민적 지지를 과신한 피노체는 대통령직을 국민투표에 부쳤다가 패배하고 만다. 그 결과 대통령직을 내놓게 되지만 피노체는 종신 상원의원직을 유지한 채 막강한 영향력을 계속 행사했다. 특히 군에 대한 그의 지배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피노체가 신병 치료차 대처 시절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온 영국을 찾은 것이 화근이 됐다. 피노체가 유럽에서 터뜨렸던 테러사건과 관련해 스페인 법원 등이 피노체의 신변을 영국에 요구하면서 피노체의 처벌문제가 국제적 쟁점으로 부상한 것이다.
국제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신변 인도를 피해 칠레로 돌아왔을 때 칠레의 상황은 변해 있었다. 국제여론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피노체 처벌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진 데다가 영국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주요 권력기관에 대한 장악력은 현저히 떨어져 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아옌데 대통령 시절 좌파 연합에 참가했던 사회당의 리카르도 라고스가 대통령 선거에 승리해 좌파정권이 집권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칠레에 도착한 그를 맞은 것은 유가족들이 제기한 소송들이었다.
학살 발뺌, 추종자들 반발피노체는 이에 대해 모든 학살들이 현지 지휘관의 짓이며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발뺌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였다. 비겁하기 짝이 없는 발뺌에 화가 난 지휘관들이 피노체의 지시였음을 증언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헬기를 타고 전국을 돌며 반대세력을 납치해 처치한 ‘죽음의 카라반’ 부대의 만행사건을 담당한 후안 구즈만 특별검사의 출두명명이 떨어지자 다급해진 피노체는 고령과 치매를 이유로 면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구즈만 특별검사는 이를 무시하고 그를 가택구속 조치를 처했다. 도저히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특별검사에 협박까지그러나 아직 낙관은 이르다. 아직도 대통령이 인사권을 갖지 못하고 있는 군부의 일부 피노체 세력은 구즈만에 대해 "바람을 일으킨 자가 태풍을 거두리라"고 협박하고 나섰고 상류층과 기득권층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다. 그 결과 상급 법원이 최근 피노체에 대한 혐의중 살인 등 일부 주요범죄에 대해 기각처분을 내렸다. 또 유가족 등은 피노체의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리고 있지만 오랜 피노체의 공포정치에 길들여진 일반 국민들은 아직도 의견을 밝히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군장성 출신의 전직 대통령을 두 명이나 구속했다는 이야기를 해주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러워했다. 이 점에서 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노태우 처벌만은 제3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권정치 지향’ 기로에공산권의 몰락 후 전통적인 이데올로기가 힘을 잃은 21세기의 정치에 있어서 핵심은 인권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이 점에서 칠레는 ‘인권의 정치’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기로에 놓여 있다. 그러나 피노체의 처벌 여부와 상관없이 칠레의 민주화는 되돌릴 수 없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즉 이제 비운의 정치인 아옌데 대통령은 완전히 복권이 되어 중심가에 동상이 세워졌고 그의 묘지에도 장엄한 기념비가 들어섰다. 그 기념비 앞에 서서 묵념을 올리면서 우리의 경우 50년대 진보당의 조봉암 등 극우정권에 의해 희생된 정치인들이 언제나 복권될 것인지 안타까운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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