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호 김성홍 김의석 장길수 정지영 장선우.. 중견감독들이다. 그들이 다시 일어섰다. 더 이상 실패하면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는 절박함이 보인다.
한국영화계 ‘중견 감독’ 은 존경이나 칭찬만 의미하지 않는다. 시대감각이 뒤져 기대할 것이 적다는 소리로도 들린다. 한국영화가 화려한듯 하면서도 허약한 이유는 미드필더인 그들의 책임이 크다. 모두 출발은 화려했으나, 최근 들어 작품성 아니면 흥행에서 우리를 실망시켰다.
스스로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오랫동안 망설였던 것을 들고 나왔다. 주문생산을 강요하는 충무로 자본이 싫어 홀로서기를 고집했던 배창호 감독은 "깊이에 앞서 힘있는 영화를 해야 겠다" 며 큰 발걸음으로 바꿨고, 김성홍 감독은 특기인 스릴러에 대중적 쾌감을 추가하는 퓨전을 시도했다.
김의석 감독은 "마냥 따뜻하기만 한 휴머니즘이 아니라 스피드와 액션이 살아있는 이야기"를 하겠다고 나섰다. 자기색깔을 포기하지 않은 선에서 좀 더 대중적인 영화. 그만큼 그들에게는 감독 생명을 이어줄 ‘상업성’이 절실하다는 이야기이다.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 지난해 <정>을 개봉하면서, 그리고 ‘정’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배창호(48) 감독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감독을 그만두든가, 상업자본과 손을 잡든가. <러브스토리> 에 이은 <정> 은 그가 고집하는 ‘감동과 정이 넘쳐 나고, 우리 자연과 생활문화가 스며있는 영화’ 가 존재할 공간이 너무나 좁다는 사실만 확인시켰다.
남은 일은 ‘어떻게 대중성과 타협하느냐’ 였다. 1980년대 자신을 스타로 만들었던 <고래사냥> <황진이>로의 회귀는 내키지도, 또 유효하지도 않다. 그래서 4년 동안 준비해왔다는 미스터리 스릴러물을 선택했다. 이미 지난달 17일 촬영을 시작한 <흑수선(黑水仙)> 은 50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황노인(안성기)과 그에 얽힌 살인사건을 그린다.
그속에는 남북분단과 전쟁, 거제포로수용소의 비극이란 역사가 있고,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이정재)의 액션과 진실을 풀어가는 흥미가 있다.
배 감독은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본질은 같다. 단지 폭 넓은 재미와 형식으로 대중적인 힘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깊이와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흥행 전성기였던 1980년대의 템포와 힘과 대중적 기호를 현대 감각으로 되살리겠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분명 그런 재주가 있다. <젊은 남자> (1995년)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을 보면.
■김성홍 감독의 <세이 예스> 박중훈이 사이코 연쇄살인마로 나온다는 자체가 스타시스템과 거리가 있었던 김성홍 (45)감독의 이전 작품과 다름을 의미한다. "배우에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그렇게 됐다"고 말한다. 그만큼 <세이 예스> (6월 개봉)는 상업성에 비중을 둔 셈이 됐다. 그는 장르가 분명하다. 적은 돈으로 탄탄하게 만들 수 있고, 감독의 연출력이 잘 드러나는 스릴러를 좋아한다.
<손톱> <올가미>가 기본에 충실한 스릴러라면, <신장개업>은 자유롭게 비틀어본 영화라고 했다. 자신은 만족하지만, <신장개업>은 흥행과 작품성에서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세이 예스>는 그 중간쯤이라고 했다. 무서움을 즐길 수 있는 무겁지 않은 영화.
권선징악이 분명한 서양의 스릴러가 아닌 둘 다 피해자가 되는 동양적 정서의 스릴러라고 했다. "이제야 영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는 김 감독은 감각을 따라가다 색깔과 무게를 잃어버리기 보다는 차분히 멀리 보고 가겠다고 했다.
"감독은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유아적이 된다."
■김의석 감독의 <청풍명월> 1992년 데뷔작 <결혼이야기>의 대성공으로 그는 본의 아니게 신세대 감각의 로맨틱 코미디 감독으로 분류된 것이 불운이었다. 상업적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이 그를 흔들어 버렸고, 홍콩 왕자웨이 감독의 스타일을 모방한 듯한 <홀리데이 인 서울> 까지 만들게 했다. <북경반점>은 자신의 영화로의 회귀였다. 가볍고 재치있는 농담과 심리묘사 보다는 인간 삶의 본질적인 것들을 끄집어 내는 휴머니즘.
때문에 <북경반점>의 흥행 실패는 김의석(44) 감독에게 충격이었다. "지나치게 모범적이었다" 는 스스로의 평가. 그래서 조선중기 쫓고 쫓기는 두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무협물 <청풍명월> 에는 그가 인위적이라고 배제한 관객의 흥미를 끌만한 극적 요소들이 많다. 역사적 근거도 찾아내 사실성을 살린다. "7,8년 전부터 하고 싶었던 작품이다. 이제는 흔들리지 않고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색깔과 재미를 찾겠다."
■기타 <실락원> <아버지>로 참담한 실패를 맛 본 장길수(45) 감독이 선택한 것은 <책상서랍 속의 동화> 나 <천국의 아이들> 같은 아이들 영화 <난나> 이다. 지난 1월 타계한 동화작가 정채봉씨의 성장소설 ‘초승달과 밤배’가 원작이다. "관객층을 넓히는 영화, 살면서 느낀 인생의 의미와 깊이가 담긴 영화"라고 했다.
장선우(49) 감독은 부산에서 또 한번 화제를 불러일으킬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촬영에 열중이고, <까> 실패 이후 한동안 현장을 떠나있던 정지영(55) 감독도 <은지화>로 곧 메가폰을 든다. 멜로 드라마지만 거기에 광주항쟁이란 상처가 스며있는, 역사와 현실의 문제를 피해가지 않는 정지영 본래의 색깔을 가진 영화이다.
감독사진/ 배창호 김의석 김성홍 정지영
<흑수선>은 남로당 간부의 딸이자 빨치산 프락치인 손지혜(이미연)의 암호이다.
<세이 예스>에서 사이코 연쇄살인범 역을 맡은 박중훈.
이대현기자 leedh@ 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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