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 밀레니엄 기행 <7> 라틴아메리카를 가다
▶ 페루 <상>
남미의 박정희 후지모리의 몰락같은 아메리카 대륙이라고는 하지만 엘에이에서 볼 때 남쪽으로 지구의 반대쪽에 위치해 서울-엘에이간 여행과 비슷한 십여시간을 날아가 도착한 페루는 특히 갑작스러운 정치적 격변으로 어수선하기만 했다. 즉 정치 스캔들속에 일본에서 전격 사임선언을 하고 그곳에 주저앉아 버린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대통령의 사임소동으로 페루의 정치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사실 페루여행을 주선한 미국여행사는 정치적 상황을 우려해 꼭 이 같은 시기에 여행을 가야하는 것이냐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지만 정치학자인 나로서는 페루정치를 공부하기에 기가 막히게 좋은 때에 페루를 찾은 것이다.
16세기만 해도 남미에 거대한 왕국을 형성했던 잉카의 중심지 페루는 이후 스페인의 지배를 겪었고 많은 제 3세계국가들처럼 독립을 했지만 경제적 낙후와 군사독재에 시달려야 했다. 빈곤과 독재는 결국 80년대 좌파정권의 집권과 무장게릴라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좌파정권이 집권하자 페루는 국제금융계에서 소외되고 연 인플레가 1만%까지 치달았다. 또 마우쩌뚱주의자들인 농촌게릴라 ‘센데로 루미노소(빛나는 길)’는 무차별한 민간인학살을 범함으로서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농대 학장서 대통령으로이 같이 우파와 좌파 모두가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일본계 2세로 농대 학장에 불과했던 후지모리는 "정직과 근면"이라는 참신한 구호를 내걸고 나와 90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특히 백인지배의 페루에서 동양계 정치인이라는 사실이 인구다수를 차지하는 인디오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는 취임 후 선거공약과 달리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해온 초강경한 긴축정책과 게릴라 진압작전을 펴나갔다. 그 결과 인플레를 20% 아래로 잡고 게릴라 역시 대부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남미정치인으로는 드물게 산간벽지를 헬기로 날라 가 서민을 만나고 현장을 지휘했던 그는 96년 게릴라들의 일본대사관 점거사태를 직접 지휘하여 진압함으로서 ‘철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유신과 같은 친위쿠테타를 통해 의회를 해산하고 개헌을 해 연임의 길을 여는가 하면 정보기관을 통해 공작통치를 펴 나감으로서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는 여러 면에서 박정희와 유사한 ‘남미의 박정희’라고 할 수 있다.
장기집권 야욕 - 공작정치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장기집권의 야욕은 그를 파멸로 몰고 갔다. 그는 3선 금지조항을 어기고 올해 3선에 출마했지만 장기집권과 공작정치의 폐해, IMF식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인구의 70%가 빈곤층으로 추락한 사회적 양극화는 그의 당선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부정선거를 통해 야당후보의 과반수를 저지함으로서 결선투표를 이끌어냈고 야당이 참여를 거부한 결선투표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그의 당인 페루2000이 의회선거에서 죽을 쑤자 심복인 정보부장 블라디미로 몬데시노가 야당의원을 끌어오기 위해 매수하는 비디오가 공개됨으로서 그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특히 미 정보기관의 지지를 받던 몬데시노가 반군과 마약상들에게 러시아 무기를 팔아 치부를 해온 것이 드러나면서 미국조차 등을 돌리고 만 것이다.
전부인도 부정폭로
현재까지 몬데시노는 8000만달러의 비밀구좌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중 스위스 은행에 숨겨놓은 2500만달러는 페루정부가 반환받을 예정이다. 게다가 현재 상원의원이자 몇 년전 이혼한 전부인이 후지모리가 일본에 1800만달러를 빼돌려 놓았다는 폭로를 하고 자신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후지모리는 아펙정상회담 참석차 아시아로 와 일본에서 주저 앉아 버린 것이다.
대통령 아닌 도망자
이를 바라보는 페루국민들의 반응은 분노와 충격 그 자체이다. 옛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서 만난 한 페루 현지교수는 후지모리에 대해 묻자 " 그 사람 이름은 후지모리가 아니라 후지티보이다"라고 빙정댓다.에 대해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후지티보는 영어로 후지티브에 해당되는 도망자라는 뜻의 스페인어로서 페루 지식인들의 반응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페루의 수도인 리마시내로부터 안데스 산간벽지에 이르는 곳곳에는 지난 대선 때 페인트로 써 놓은 "후지모리를 대통령에", "페루 2000"이라는 구호들이 남아 있었는데 그 위에는 거의 예외 없이 검은 페인트로 가위표를 쳐놓았거나 NO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페루의 정치 일번지이자 ‘페루의 명동성당’이라고 할 수 있는 리마 중심가의 산 마르틴 광장도 예외는 아니다.
이중국적 철저히 숨겨
’남미해방의 아버지’ 시몬 볼리비아와 함께 남미독립에 앞장서 페루를 해방했던 호세 드 산 마르틴을 기념하는 이 광장에는 노동자와 지식인들이 후지모리의 페루송환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걸어 놓고 농성을 하고 있었다. 물론 후지모리의 지지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페루에서 만난 적지 않은 사람들은 후지모리의 지지자라고 밝히면서 인플레를 잡아 경제를 살리고 무장게릴라를 소탕해 정치적 안정을 가져다 준 그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들일수록 그의 갑작스러운 해외도주에 실망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민주화돼도 앞날 험난
특히 당혹감은 그 동안 후지모리가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철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더욱 큰 것 같다. 사실 후지모리는 해외도주시 이혼후 사실상의 훠스트 레이디 역할을 해온 딸에게까지 망명계획을 알리지 않고 혼자 뺑소니를 치는 비겁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일본망명과 관련해, 그가 일본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이중국적자로서 망명절차가 필요 없는 것으로 밝혀짐으로서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걱정했던 군이 새 임시정부에 충성을 맹세하고 군의 중립을 선언한 것이다. 몬데시노는 비디오사건 뒤 해임된 뒤 망명을 나갔다가 국내로 밀잠입, 은신중인 것으로 알려져 그를 지지하는 군부에 의한 쿠테타를 우려했었다. 그러나 임시대통령직을 맡은 발렌틴 파니아과 국회의장은 거국내각을 구성하고 후지모리의 비리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는 한편 몬테시노 계열인 군장성 12명을 전역시켰다. 그리고 새로 임명된 군부는 군의 중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페루민주주의의 앞날이 밝은 것만은 아니다. 심각한 것은 사회경제적 문제이다. 악명 높은 리마의 판자촌과 안데스지역 인디오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빈곤, 특히 후지모리의 신자유주의정책에 의해 심화된 사회적 양극화의 부작용은 그 동안 철권통치에 의해 억눌려 왔지만 이제 민주화의 열린 공간에서 폭발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미 리마에서는 통신노동자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리고 있었고 관광도시 쿠스코에서도 버스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교통이 마비되어 주민들은 물론 관광객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지금 페루는 ‘남미의 박정희’의 유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고통스러운 첫 걸음을 내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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