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전 우리 가족은 LA카운티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갈 집을 고르면서 아이들의 의견도 참고할겸 되도록 아이들을 같이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이 영 신통치가 않았다. 보는 집마다 집 색깔이 싫다, 방이 너무 작다…번갈아 가며 트집을 잡는 것이었다. 참다못해 “너희들이 바라는 게 도대체 뭐냐”고 다그쳤더니 그제야 아이들이 입을 열었다.
“이사 안가는 거요. 이사가는 거 싫어요. 엄마 아빠 미워…”
정든 동네와 친구들을 떠나면서 아이들이 겪어야할 상실감,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 두려움을 이해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 문제로 충분히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그게 아니었다. 머리로는 이해했을 지 몰라도 감정적으로는 “우리 부모가 내 인생을 다 망치려 든다”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속으로 누르고 있던 상태였다. 아이들의 심통은 ‘이사 때문에 아픈 마음’을 내흔들어 보이는‘신호’였던 것이다.
며칠전 샌디에고 인근 샌타나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은 어린 소년이 분노와 좌절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폭발해버린 케이스로 보인다. 부모의 이혼,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외로움, 엄마 없는 슬픔으로 이미 상처가 많았을 텐데, 엄마도 돼주고 가족도 돼주던 이웃을 떠나 수천마일 낯선 곳으로 이사하며 뿌리 뽑히는 아픔이 더해졌고, 거기에 짓궂은 아이들의 끊임없는 놀림이 기폭제가 되었던 것 같다. 왜소한 체구에 목소리도 여자소리 같이 높은 사춘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던 것이 분명하다.
안타까운 것은 앤디라는 그 소년이 필시 이런 저런 방법으로 표출했을 “너무 힘들다”는 신호를 아무도 읽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신호를 알아채고 분노를 다독거려 주었다면 15명이 사상당하는 끔찍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실제로 범행전 주말, 소년은 여러사람 앞에서 “다 쏘아버리겠다”는 말을 했다지만 아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신호’는 눈빛만으로도 말이 통하는 친밀한 관계에서만 이해가 되는 데 소년에게는 그런 대상이 없었던 것같다.
자녀들, 특히 10대 자녀들을 키우다보면 “아, 그때 그래서 아이가 그랬구나”“그만하니 다행이지 큰일 날뻔 했다”며 뒤늦게 안도의 숨을 쉬는 경우들이 있다. 물론 “그때 바로 잡아줬어야 하는데…”하며 크게 후회하는 경우들도 없지 않다.
한 친구가 지난해 10대 중반 딸과 벌인 신경전을 털어놓았다. 그 딸은 공부 잘하고 빈틈없는 모범생으로 정평이 나있는 아이였다.
“아이가 뭔가 이상한거야. 안아주려 하면 몸을 빼고, 잠 자기전 뽀뽀를 해도 입이 닿기가 무섭게 떼어버리고, 꼭 필요한 말 아니면 안 하고, 제 방에만 틀어박혀 있고…뭔가 나를 밀어내는 벽같은 게 느껴졌어. 그게 다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더군”
나중에 알고보니 딸이 호기심에 마약을 입에 대보고는 죄책감에 부모를 피한 것이었다.
“어느날 아이 방에 들어갔는데 아이가 친구에게 쓴 편지가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어. 아무 생각없이 읽어보니 그런 내용이었지. 처음에는 정신이 아득했어. 마음을 진정시키고 딸을 불러 물어보니 울면서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동안 혼자 끙끙 앓느라 저도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 그후로는 아이가 예전처럼 밝아졌어”
지나고 보니 “아이의 거부의 몸짓은 사실은 ‘내게 문제가 있어요’하는 신호였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이민 1세 부모가 한국에서 자랄 때와 비교해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지금 미국의 환경은 많이 불안정하다. 깨어진 가정, 너무 바쁜 부모, 권위는 거부되고 자율만 강조되는 문화, 희미해진 가치관, 넘치는 정보와 유혹, 손만 뻗으면 잡히는 총기 … 한번 삐끗하면 영영 잘못될 수 있는 요소들이 너무 많다. 아슬아슬하게 성장기를 넘기는 것이다.
뿌린 만큼 거둔다는 진리는 자녀양육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작은 변화, 작은 신호도 예민하게 감지하며 관심을 기울여주는 부모가 있다면 아이들은 한두발 잘못 내디뎠다가도 곧 되돌아오게 되어있다. 뿌리가 튼튼하면 사과가 나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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