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개정이민법 통과로 황색 아시아인들에 대한 좁은 문이 부서져 열림에 따라 한국서 이민자들이 조금씩 건너와 로스앤젤레스의 퇴색해가던 올림픽 블러버드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기회의 나라에서 아들 딸들을 교육시키려는 원대한 집념을 가진 부모들을 따라 수백명의 어린이들도 이곳에 왔다.
이들중에는 LA코리아타운이 생겨날 무렵 첫 영문 미주한인 주간신문의 발행인으로 3년동안 일했던 나를 스쳐간 기명이라는 이름의 14세 소년이 있었다.
이민온 지 얼마 안된 기명네 가족은 다운타운 LA 빈민지역의 무너져가는 2층 건물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을 막 렌트했었다. 그것은 1979년이었는데 마치 까마득한 옛날과도 같다.
우리 편집실은 음침한 전 양로원 건물 2층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건물은 수완좋은 한인이 우리 일을 위해 작업장 및 살림집으로 개조해놓은 것이었다.
주간지 제작진 5명은 전직 교사였던 이광섭씨(당시 38세)가 이끄는 그 소년가족과 ‘결연’ 비슷한 관계가 되었다. 우리는 곧 좋은 이웃이 되었다.
이씨 가족의 하루 일과는 일찍 시작되었다.
어머니 길자씨는 새벽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그날 식사를 위해 밥을 지었다. 맨 밑 두아이는 여섯 살, 세 살로 어머니가 12시간 봉제일을 하러 떠날 때면 울음을 터뜨렸다. 곧 이어 허약한 체격의 아버지는 그가 얻을 수 있는 하루 노동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은 큰아이 두명 -- 기명과 기숙 (13세) -- 에게 무거운 부담을 주었다. 그들은 부모가 없는 동안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한 마디 불평 없이 집안 잡일, 청소, 빨래, 닦기, 그리고 70년된 집건물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일을 분담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아이들이 노는 동안 내가 모든 일을 했지요,"라고 어머니는 회상했다. “이제 형세가 바뀌었어요. 애들 모두 도와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제가 일하러 나가있는 동안 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요. 집안이 매일 먼지 한점 없게 됐지요."
미국에 도착한 후 그들은 하시엔다 하이츠 교외에 있는 친척집에 임시로 머물렀다. 그때 기명이 자동차에 치이는 것을 아버지가 지켜보며 공포에 질렸다. 소년이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으나 자동차 운전자가 보험에 들어있지 않아 사고는 무일푼 가족에게 700달러의 빚을 안겨주었다.
기명이 사고를 당한 며칠 후, 아버지가 운전면허시험을 치러가서 정지 신호에 서있다가 뒷차에 들이받히고 말았다.
이 두 사고로 집안 가장이 망연자실하게 되었다. 그는 자동차에 엄청난 공포를 가지게 되었다. LA 프리웨이 판도에서 자동차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는데.
“그냥 운전을 할 수 없었어요. --- 차들이 두려울 따름이에요," 라고 낙담한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이러한 기본 생존수단의 결여로 이씨 가족은 걷는 거리 안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한인타운 가까이로 이사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15년간 타이핑을 가르치면서, 주로 앉아서 일했던 학교 교사였던 그에게 건설노무자 일은 모진 것이었다. 더 힘들게 했던 것은 노무자일이 끝나고 다음 일자리를 얻을 때까지 빈둥거려야 하는 것이었다.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언어와 문화 장벽으로 격리되어 그 가족은 메인스트림 안전망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벗어나있었다. 그들은 혼자 힘으로 꾸려나가야 했다.
이들을 결속시킨 것은 서로간의 애정과, 가족에게 충실함, 그리고 더 좋은 학교교육에 대한 열망이었다.
매일 아침 6시면 기명은 오랜동안 꿈꾸어왔던 미국교육을 받기 위해 길고 위험한 도보 등교를 했다.
조용하고 생각깊은 기명은 걸어서 1시간반 걸리는 잔 아담스 중학교를 향해 집을 떠났다. 넘치는 러시아워 도심지 대혼란 속에 37개의 위험한 블락을 지나가야 했다.
다운타운 고층빌딩 미로를 지나 저녁때는 부푼 발을 끌고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다른 방도가 없었다. 잔 아담스는 다 쓰러져가는 그의 집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중학교였다.
기숙과 은혜(6), 두 여동생은 집에서 세 블락 떨어져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으므로 덜 힘들었다.
한국에 있을 때 기명은 중학교 2학년 최우수학생이었다. 그러나 이곳 미국에서는 영어를 못하므로 학생많은 도심지 학교에서 벙어리처럼 말못하는, 불쌍한 아시안 소년이됐다.
내가 종종 함께 했던 저녁식사 시간에 기명은 유교사회에서 온 부모들을 놀라게 하는 학교 일들을 하나씩 이야기 했다.
예를 들면, 어느날 학급 친구 한명이 최루가스캔을 뿌리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이 크고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꿈꾸었었어요," 라며 “그러나 이제는 좀 두려워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굳세고 강건한 그였다.
어느 무더운 오후,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에서 집에 돌아온 기명을 보았다. 그는 집앞 계단에 앉았다. 신발을 벗으니 맨발이었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움츠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부모님에게 이야기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사정했다. 나는 목에서 무엇이 치올라오는 것 같았다. “물론, 말 안하지,"라고 중얼거렸다.
미국 한인타운의 작은 전사들은 그처럼 강철같이 만들어졌다.
기명아, 네가 어디에 있든 성공을 빈다. 그리고 기명이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전사가 주었던 그 고무적 추억을 되새기며 너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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