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것들에 관한 많은 작품을 만들어 ‘메시지 영화인’이라 불린 제작자요 감독이었던 스탠리 크레이머가 19일 우들랜드힐스의 영화와 TV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87세.
크레이머는 인종편견, 탐욕, 핵의 인류파멸 및 파시즘을 비롯해 창조론 대 진화론등 문제성 있는 다양한 주제를 다뤄 ‘할리웃의 양심’이라 불렸다. 토니 커티스와 시드니 포이티에가 주연한 ‘흑과 백’과 스펜서 트레이시의 유작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흑백문제를, 게리 쿠퍼가 나온 ‘하이 눈’은 불의에 맞서는 용기를, 2차대전 전범재판을 다룬 ‘뉴렘버그의 재판’은 파시즘을, 비비안 리의 마지막 영화로 올스타 캐스트의 ‘바보들의 여객선’(65)은 인간 탐욕을, 그리고 ‘그 날이 오면’은 핵의 공포를 다룬 작품들이다. 또 소위 ‘원숭이 재판’을 다룬 ‘바람을 상속받으리’는 창조론 대 진화론 문제를 다룬 작품. 크레이머는 이 영화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아 종교계로부터 ‘반신적 영화’라는 비난을 받았다.
나는 그가 영화인 생활 초창기에 제작한 영화들을 대부분 중·고등학생 시절에 봤다. 커크 더글러스를 일약 스타로 부상시킨 ‘반권투’ 영화 ‘챔피언’, 코주부 검객시인의 비극적 사랑이야기 ‘검객 시라노’, 세일즈맨의 비애를 그린 ‘세일즈맨의 죽음’ 그리고 멋쟁이 말론 브랜도가 가죽점퍼에 캡을 쓴 모터사이클 갱 리더로 나온 ‘난폭자’들이 다 그때 본 것들이다. 또 미해군의 선상반란을 다룬 ‘케인호의 반란’을 서대문에 있던 동양극장에서 보며 느끼던 흥분감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중에서도 내가 유난히 마음을 준 영화는 ‘그 날이 오면’이다. 나는 이 영화를 명동극장에서 봤는데 전 세계를 파괴시킨 핵의 낙진이 점차 호주를 덮어가면서 이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매우 불길하고 운명적인 영화다. 그레고리 펙, 에이바 가드너, 프레드 애스테어 및 앤소니 퍼킨스 등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고 호주 민요 ‘월칭 마틸다’의 여운이 귀에 삼삼히 남았던 기억이 난다. 라스트신이 충격적인 별나게 애착이 가는 감상적인 영화였는데 일부 비평가들은 이런 감상성 때문에 이 영화를 깎아 내리고 있다.
크레이머는 자기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감상성 때문에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이들은 또 그의 작품이 자화자찬식이요 자기 정당화적이라면서 경박하고 터무니없는 내용의 영화를 만든다고 가혹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크레이머는 "나는 메시지 영화에 관심 없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메시지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했었다.
그는 ‘자랑과 정열’ ‘미치고 미치고 또 미친 세상’ 등 엉터리 영화도 만들었지만 사회문제에 대한 끈질긴 관심을 표명한 의식 있는 사람이요 2차대전 종전 직후 당시로서는 감히 생각하기도 힘든 독립제작사의 효시라 부를만한 ‘스크린 플레이즈’를 창립한 개혁인이다. 작품을 통해 기성 체제에 도전했고 행동하는 영화인으로서는 할리웃 체제에 도전했던 투사였다. 그리고 그의 영화들은 재미가 있다.
크레이머는 자기 회사를 차린 후 값어치가 있고 돈 많이 안 들인 흑백 메시지 영화들을 계속 제작했다. 그러다 1955년 콜럼비아사에 자기 지분을 팔고 그 산하로 들어간 것은 늘 꿈꾸던 감독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이 결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진지하고 심각하며 또 조용하고 주도면밀했던 크레이머는 뉴욕 빈민가 태생으로 뉴욕대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할리웃으로 와 MGM서 온갖 궂은 일을 하며 영화 일을 배웠다.
크레이머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 이후 몇 편의 흥행 실패작을 낸 끝에 1977년 시애틀로 이주, 지방신문에 칼럼을 쓰고 대학서 강의했다. 그가 80년대 중반 할리웃 컴백을 시도했을 때 발생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크레이머는 어느 날 한 메이저의 젊은 고급 간부와 영화제작을 논의하게 됐다. 젊은 간부가 크레이머에게 "먼저 당신에 관해 소개하시오"라고 말하자 기가 찬 크레이머는 "당신이 먼저 자기 소개를 하시오"라고 말을 던지고 사무실을 나왔다고. 그 뒤로 그는 할리웃 컴백을 포기했다. 크레이머가 만든 35편의 영화는 85개가 오스카상 후보에 올라 15개의 상을 받았다. 그는 1961년 ‘꾸준히 양질의 영화’를 만든 공로로 오스카 특별상인 어빙 탈버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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