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가 대통령이 된 후 제일 먼저 읽기 시작한 책은 존 퀸시 애덤스 제7대 대통령 전기로 알려져 있다. 너무나 많은 역사적 유사점 때문이다. 대통령의 아들로서 대통령에 출마한 케이스는 여러 차례 있지만 대통령이 된 사람은 존 퀸시 애덤스 이후 조지 W가 처음이다. 이같은 역사적 유사점과 관련해 부시가 애덤스의 전기를 선택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존 퀸시 애덤스처럼 ‘실패한 대통령’이 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아서다.
조지 W의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애덤스 대통령의 유산’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최근 백악관 만찬에서 아버지 부시는 ‘2000년 대통령선거는 1824년 대통령선거와 너무 흡사하다’고 말했다. 존 퀸시 애덤스나, 조지 W 둘 다가 테네시 출신 후보와 싸웠고 박빙의 접전 끝에 포퓰러 보트에서는 졌지만 선거인단 확보에서는 승리해 결국은 대통령이 된 점에 주목하면서 ‘애덤스 가문’과 ‘부시 가문’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유사성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조지 W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은 애덤스 가문과 부시 가문을 비교해 왔다. 정작 그가 당선되자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을 직접 비교하면서 부시 2세의 행정부가 애덤스 2세 행정부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닌가 하는 전망이 일부에서 벌써부터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조지 W 부시와 존 퀸시 애덤스는 단순히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점 외에도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애덤스는 1787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다. 부시는 1975년에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애덤스의 경쟁자 앤드류 잭슨과 부시의 경쟁자 앨 고어가 모두 테네시주 출신으로 잭슨은 연방하원의원, 고어는 상원의원을 지냈다는 것도 우연 치고는 너무나 공교로운 유사점이다.
이 둘의 성격은 그러나 전혀 다르다. 부시는 개방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이다. 반면 애덤스는 ‘철가면’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내향적인 성격이다. 애덤스는 몬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고 몬로 독트린의 정책 실무자였다. 미대륙에서 유럽 열강의 간섭을 배제시킨 이 몬로 독트린은 당시 미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어찌 보면 애덤스는 그 여세를 타고 백악관 진입에 성공한 것이다.
단임으로 물러난 애덤스는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 의회에 진출한 애덤스는 전혀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연방하원의원으로서 애덤스는 노예제도를 공격하고 표현의 자유 신봉자로서 맹활약을 함으로써 민권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는 또 변호사로서 노예선에서 선상 반란을 일으킨 흑인을 연방대법원에서 성공적으로 변호하기도 했다.
이같은 업적에도 불구, 애덤스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재임에 실패한 대통령(첫 번째는 묘하게도 그의 아버지인 제2대 존 애덤스 대통령이다)으로 주로 기억된다. 또 융통성이 없고, 감사할 줄 모르며, 혼자 의로운 체하는 인물로 부각돼 있다. 이같은 성격상의 문제와는 별도로 애덤스는 가장 ‘준비가 잘 돼 있었던 대통령’이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는 지적으로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다. 판단력이 우수하고 남다른 통찰력을 지녔고 독서광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같이 모든 면에서 너무 뛰어난 게 애덤스가 지닌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대통령으로서 애덤스의 실패는 바로 부시가 빠져들기 쉬운 함정이 될 수도 있다. 1824년 대통령선거는 4파전으로 나뉜 치열한 싸움으로 애덤스의 정치적 몰락은 이 치열한 접전에서 소수의 지지를 받았다는 데서 어느 정도 예견됐다고 볼 수 있다. 이 해에 출마한 후보는 모두 4명으로 1위는 41%의 지지를 받은 앤드류 잭슨이고 31%를 받은 존 퀸시 애덤스가 2위, 나머지 표는 하원의장인 헨리 클레이와 재무장관인 윌리엄 크로포드 지지로 나뉘었다. 과반수 지지를 받은 후보가 없어 결국은 연방하원이 대통령 선출에 나서 애덤스는 클레이의 지원에 힘입어 간신히 대통령에 선출됐다.
부시가 맞은 상황도 그 당시와 흡사하다. 포퓰러 보트에서 앨 고어에게 뒤졌으나 대법원 판결 결과 간신히 과반수 선거인단을 확보, 대통령이 된 것이다. 또 의회는 공화, 민주 양당으로 정확히 반분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성공적인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부시가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자신이 소수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이라는 지적이다. 이 사실을 망각할 때 애덤스의 전철을 밟게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애덤스는 소수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클레이를 국무장관에 임명한 것이 바로 그같은 포퓰러 보트의 결과를 무시한 결정으로 이는 잭슨파를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반애덤스 세력의 반발을 불러왔고 그 결과 애덤스는 재선에서 잭슨에게 참패, 결국 실패한 대통령이 됐다.
관심은 벌써부터 부시가 애덤스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에 몰려 있다. 대통령으로서 부시가 처음 취한 조치는 진보세력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한 조치들이었다. 해외의 낙태지원 그룹에 대한 연방기금지원 중단, 새 피임약 RU-486 판매허용 조치 재검토 등이 바로 그 조치들이다. 부시는 또 진보세력의 거센 비판을 무릅쓰고 존 애시크로프트를 법무장관에 기용했다.
대통령으로서 부시의 첫 행보에는 공화당 우파도 당혹감을 내비치고 있다. 이들은 자유 진보파의 기수 에드워드 케네디도 지지하고 나선 부시의 교육정책이 정통 공화당 노선에서 이탈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의 시선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국방예산의 대폭 증강을 원하고 있는 공화당 내 매파들도 당황한 기색이다. 국방비 증액을 당분간 동결한 조치 때문이다.
애덤스의 실패는 그가 반대파에 손을 내밀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비사교적이고 오만한 성격과 정치적 미숙에 주로 기인한 것으로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이 점에서 부시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부시의 특기는 친화력이다. 또 취임 3주가 지난 현재 정치력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도 입증했다. 부시는 그러나 애덤스가 보인 정치적 실수를 범할 가능성도 있다. 반대 진영을 달래려는 유화책을 구사하다가 동맹세력으로부터 반발을 사는 경우다. 앞으로의 워싱턴 기상도가 주목된다.
대통령의 아들이 대통령이 된 경우는 미역사상 현재까지 단 두차례다. 그러나 대통령의 친인적이 대통령이 된 경우는 적지않다.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은 윌리엄 헨리 해리슨 대통령의 손자다. 제임스 메디슨 대통령과 자카리 테일러 대통령은 6촌간이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시오도어 대통령의 9촌 조카뻘이 된다. 루즈벨트 집안과 대통령가문과는 가장 인연이 많아 모두 11명의 전 대통령들이 루즈벨트 집안과 친척이 된다.
대통령의 아들이 출마해 대통령이 된 케이스는 존 퀸시 애덤스와 조지 W 부시등 두명이다. 다른 대통령의 아들들도 대권에 도전을 했다. 1848년 마틴 밴 뷰렌 대통령의 아들 존 밴 뷰렌이 대통령 후보가 됐다. 1856년에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아들 존 스캇 해리슨이 출마를 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아들 로버트 토드 링컨은 1884년과 1888년 잇달아 출마했으나 실패했고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의 아들 로버트 태프트는 1940년, 48년, 52년등 무려 세차례나 출마했으나 대권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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