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잊혀졌지만 80년대만해도 커피를 마시면서 하는 조크가 있었다. 커피에 아무 것도 안넣고 블랙으로 마시면 ‘시민권자’, 크림만 타면 ‘영주권자’, 설탕·크림 모두 듬뿍 타면 ‘순종 한국사람’. 그래서 집주인이 커피를 대접하면서 “영주권자세요, 시민권자세요?”라고 물으면 손님도 알아서 대답을 하며, 같은 농담 아는 사람끼리의 친밀감을 나누곤 했다.
미국식 생활방식에 얼마나 물이 들었는가를 빗댄 조크였는데 그런 조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밸런타인스 데이 같다.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2월, 그것도 주중에 어정쩡하게 끼여있는 이날을 맞는 모습이 이민 1세부부들은 통일되어 있지 않다. 사랑의 표현방식과 정서가 얼마나 미국화했느냐에 따라 몇 부류로 나뉘어진다. 밸런타인스 데이가 다가오면 아내에게 어떤 기발한 선물을 할까 고심까지 하는 미국남성들, 그 진짜 ‘시민권자’에서부터 그런 날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순종 한국사람’의 사이 그 어디엔가 속하는 것이다.
중년부부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가장 흔한 부류는 ‘영주권자’ 다. 밸런타인스 데이가 아내에게 꽃을 보내는 날이란건 알고 있지만, 그래서 어느 해에는 큰맘 먹고 보내보기도 했지만, 대개는 그냥 슬쩍 넘어가고 마는 부류다. 평소에 안해보던 일이라서 쑥스럽고 거북하기 때문이다. 40-50대 부부가 모인 자리에서 한 50대 남성은 이런 농담으로 꽃 안보내는‘영주권자’ 남편의 깊은 속뜻을 전했다.
“꽃을 왜 특별한 때만 보냅니까? 난 앞날을 생각해서 미리 마당에 장미를 잔뜩 심어놓았지요. 그래서 밸런타인스 데이가 되면 아내에게 묻습니다. 장미를 두고볼래, 꺽어주랴? 빨간 장미, 노란 장미 원하는 대로 다 있으니까요”
‘영주권자’남편들은 밸런타인스 데이만 고민이 아니다. 아내의 생일, 결혼기념일에 카드 고르는 것도 만만치 않다. 50대 후반의 한 남성은 60년대에 유학 오고 수십년 미국직장에 다니면서도 정서적으로 ‘시민권자’되기가 쉽지 않았다. 아내에게 카드를 보내야할 날들이 오면 딸을 데리고 가서 자신은 차에서 기다리고 딸이 카드를 고르게 했다. 매번‘사랑하는 아내에게’카드를 고르자 가게주인은 아이가 글을 못읽는 걸로 오해를 했다고 한다.
‘시민권자’중에는 ‘귀화 시민권자’와 ‘타고난 시민권자’가 있다. 밸런타인스 데이를 설날이나 추석지내듯 즐기는 사람은 ‘타고난 시민권자’, 그렇게 몸에 배지는 않았지만 “특별한 날이라니 아내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꽃도 보내고 외식도 하며 노력하는 사람은 ‘귀화 시민권자’로 분류할수 있겠다.
밸런타인스 데이 카드, 초컬릿 주고받기를 유치원때부터 해온 우리 2세들은 물론 ‘타고난 시민권자’들이지만 1.5세의 30대부부들도 이제는 대개 ‘타고난 시민권자들’이다. 우리 신문사의 한 남자후배는 밸런타인스 데이면 6커플이 함께 지내는 것이 연례행사다. 꽃과 선물은 기본이고 그외 뭔가 특별한 것으로 아내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여섯 남자들은 머리를 짜며 아이디어를 모은다고 한다. 그간 아내들을 가장 감동시킨 ‘특별순서’로는 ‘사랑의 고백편지 바치기’가 있었다.
올망졸망 아기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심신이 탈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자들이 난생 처음 알게되는 30대 초중반의 시기에, 남편들의 이런 정성은 아내들에게 활력이 될것이 분명하다.
쓴 커피 싫은 사람이 ‘시민권자’ 되려고 억지로 블랙커피를 마실수는 없다. 밸런타인스 데이에 장미 바치는 것이 반드시 선진문명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같이 살아가는 사람사이의 관계이고, 그 관계를 풍요롭게 하는 데는 사랑의 표현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꽃한송이 살줄 모르는 ‘구식’ 남편에게서 12송이 장미를 기대할 만큼 꿈이 야무진 아내는 많지 않다. 하지만 세상 여자들 모두 사랑의 고백을 받는다는 날, 남편이 어떤 식으로든 사랑의 표현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오래된 집일수록 알록달록 꽃도 심고 페인트도 칠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그래야 집이 생기를 잃지 않는다. 수십년 해묵은 관계일수록 이따금씩 색다른 기쁨들이 필요하다. 그렇게 활력을 불어넣지 않으면 앞으로 한참 더 이어질 부부의 여정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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