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신, 장비제조등 연쇄반응
▶ 유통, 자동차등 업종불문
미국 기업들 사이에 심상치 않은 감원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90년대초 극심한 불경기에 고생했던 기업들이 경기침체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앞다퉈 감원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미국경제가 사상 최장기의 호경기를 기록하고 있으며 언제까지 가느냐가 관심사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핑크 슬립’이 난무하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 사이에 더욱 거세지기 시작한 이번 감원 바람은 과연 어디까지 불 것인가.
클리블랜드에 사는 8세 소녀 멜로디는 작년 크리스마스 때 받은 10달러를 봉투에 넣고 "이 돈을 보태 사람들을 다시 고용해주세요"라고 써서 얼마전 LTV철강회사로 보냈다. 독신모인 어머니가 주당 261달러의 실업수당으로 살림을 꾸려 가는 모습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LTV는 어머니 재키 체이스가 연봉 3만5,000달러를 받으며 최근까지 일했던 곳이다.
보스턴의 컨설팅회사에 다니던 사라 프로먼은 며칠전 회사에 출근하자 보이스 메일에 "사장실로 오라"는 메시지가 남겨 있었다. 프로먼이 사장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비서는 난처해하며 시원한 대답이 없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물론 ‘핑크 슬립’이었다.
’임플로이이서비스 닷 컴’(EmployeeService.com)의 커트 크리센슨은 어느 날 사장이 부르더니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가 있는데 어떤 것을 먼저 듣고 싶으냐?"고 물어 "좋은 뉴스"라고 하니까 "올 겨울에는 스키를 실컷 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날이 ‘임플로이이-’에서 보낸 크리센슨의 마지막 날이었다.
미국에 거센 감원 바람이 불고 있다.
감원 바람이 불 때면 언제나 그렇듯 이번 감원도 업종 불문이다. 물론 경기 둔화가 직접적인 이유다.
학계에서는 아직 경기침체로까지는 치닫지 않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기업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경기는 지표 이상인 모양이다. 경영실적이 악화된 기업은 물론 향후 매출 감소를 예상하는 기업까지 무차별적으로 대규모 감원을 단행하고 있다.
이번 감원의 1차 진원지는 통신업체. 경쟁업체들간의 치열한 가격인하로 매출 감소가 두드러지고 있는 전화 회사는 물론 이와 관련된 장비제조업체에까지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 2위의 장거리 전화회사인 월드컴은 이달초 작년 실적을 발표하면서 1만명을 해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무선통신회사와의 제살깎기식 가격인하 경쟁으로 장거리 전화사업은 물론 전화카드 사업에서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업계 수위인 AT&T 역시 기업 분할을 추진하면서 2,000명의 근로자를 추가 해고한다는 방침이다.
통신업계의 불황은 장비를 제조하는 기업에까지 이어져 미국내 최대 통신장비업체인 루슨트 테크날러지스는 최근 1만6,000명의 인원을 해고할 것이라는 계획을 발표했다. 전화회사가 장비 구입을 줄이는 데 따른 일종의 도미노 현상이다.
인터넷 기업들의 도산 및 감원은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돼 매달 가속도를 붙여가고 있다.
고용문제연구기관인 ‘챌린저’, ‘그레이 & 크리스마스’는 29일 보고서를 통해 인터넷 기업 감원 규모가 1월중 1만2,828명으로 전달보다 23%나 증가했다고 밝혔다. 반년만에 100개가 넘는 기업이 문을 닫고 600개 기업에서 5만4,000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은 셈이다. 아메리카온라인(AOL)이 직원을 감축한다는데 다른 닷컴기업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구조조정의 내용이 일반적인 인터넷 상거래나 포털서비스 업체에서 전문기술 응용 분야에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인터넷 상거래로 수익성 악화가 심한 유통업체도 감원의 불똥에서 예외가 아니다. 12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몽고메리가 문을 닫았고 업계 5위인 JC페니도 5,500명 이상 감축을 결정했다.
미국 기업들의 감원 사태는 그만큼 향후 경기가 안 좋을 것이라는 방증이다. 경기가 둔화되고 매출이 줄어들 것에 대비해 미리부터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것이다.
기업 내부의 문제라면 다른 방안을 강구할 수도 있지만 현재 미국 기업들이 직면한 문제는 전 반적인 수요 감축이기 때문에 장사가 안되는 사업 부문을 줄이는 길밖에 없다. 자동차 업계가 대표적이다.
크라이슬러는 3년간 13개 라인과 2만6,000명의 인원을 감축한다고 밝혔고, 제네럴모터스(GM)도 1만4,400명의 정리계획을 밝혔으며, 포드 역시 올해 안으로 2,000명을 줄인다는 방침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31일 단기금리를 0.5%P 추가 인하한 것도 이 같은 실물경제에서의 찬바람을 피부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스탠포드 대학의 폴로머 교수는 "미국 기업은 경기가 호황일 때에도 기업도산과 이에 따른 해고가 계속돼왔다"면서 "경쟁력이 없는 기업들은 사전에 몸집을 줄이고 그래도 안되면 문을 닫는 구조조정이 일상화 돼 있다"고 설명한다.
이번 감원 바람은 예전과 다르며 설사 감원이 돼도 그렇게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고 다는 낙관론도 있다.
이 같은 낙관론을 펴는 사람들은 우선 실업률이 지난 약 30년 사이 최저수준을 넘나들고 있으며 해고된 근로자들도 신속히 다른 일자리를 찾는다고 지적한다.
경제분석가들은 대체로 금년 실업률이 5%를 많이 넘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이 정도라면 정상적인 경기침체기와 비교하면 매우 낮은 것이다. 물론 1%의 실업률이란 100만명의 근로자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긴 하나 ‘프리마크 디시전 경제연구소’의 경제분석가 앨런 사이나이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볼 때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닷컴 기업에서 핑크 슬립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도 컴퓨터 지식에 대한 수요가 높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번 감원이 특이한 점은 기업들이 ‘비가 내릴 것에 대비해 미리 우산을 편다’는 사실로 인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업들로서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신조 아래 감원이라는 칼을 빼드는 공격적 방어전략을 구사하는 셈이다.
기업이나 기업인에 대한 개념의 변화도 감원 바람을 부채질하고 있다.
옛날 같으면 감원을 함으로써 구조조정을 하는 기업인들은 경멸의 대상이 됐으나 요즘은 미국 가구의 약 49%가 주식을 소유, 주가에 민감하기 때문에 감원의 칼의 빼는 기업인들도 경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한 가지 아이러니가 있다면 감원이 주가상승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인데 월스트릿의 현실이야 어찌됐건 대중의 개념은 변하고 있다.
이번 감원은 이처럼 ‘선제공격적’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에 경기 침체의 분위기가 일신되면 많은 기업이 즉시 고용을 확대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돈다. 이같은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오늘 감원으로 몇 푼을 절약한 기업은 내일 고용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감원을 했다 하면 신참부터 자르는 것이 미국의 기업풍토였으나 요즘은 이것도 변했다. 연공을 무시하고 회사에 도움이 되는 사람은 일자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감원 바람이 어디서 불건 회사에 이익을 주는 사람은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감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는 문제에 대해 취업소개 회사 ‘드레이크 빔 모린’의 데일 클램포스 부사장의 주장은 더욱 인상적이다.
"현재의 직업과 직위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감원을 당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새로운 가능성의 추구라는 면에서) 위험부담을 충분히 감수하지 않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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