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 젖은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의지할데 없는 한 중국 젊은이가 다가오는 탱크에 돌진하는, 죽음을 무릅쓴 다윗과 골리앗 대결 같은 TV장면을 기억하는가.
심장을 멎게 하는 그 순간 세계는 숨죽이고 있었다.
4.29폭동 10주년이 다가오면서 나는 또 다른 외로운 인물을 떠올리게 된다 한인 식품상인의 아들이었던 UCLA학생으로 불행한 동족 이민자들에 대한 언론 주동의 공략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LA타임스에 항의하기 위해 심금울리는 편지를 썼다.
“나는 우리 아버지의 안전과 안녕이 걱정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사우스센트럴 로스앤젤레스의 문제를 파고드는 언론의 방식때문입니다."라고 임수현군은 당시 편집인이었던 셸비 코피에게 편지를 썼다. 정치적으로는 강하나 경제적으로는 취약한 한 마이너리티그룹이 영어를 못하면서 돈을 잘버는 이민자들을 끊임없이 비난하고 있는 타운의 유일한 신문의 편집인이었다.
그것은 이 자유의 땅에서 모든 난동의 극치였던, 상태, 즉 LA한인타운이 불타고 사흘간 소이탄이 터지며 약탈과 고의적 상해가 횡행하기 1년 전이었다.
임수현군의 편지는 코리언아메리칸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에 LA타임스 여론난에 실린 유일한 한인 편지였다. 그때 미국서 교육받은 한인 엘리트들은 더럽고 누추한 상점 주인들이 받고 있던 학살적인 공격에 초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사우스센트럴 LA에서 일하는 한인 상인인데 나는 아들로서 매일 아버지의 삶이 걱정스럽습니다. 두 소수민족 그룹은 모두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감수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모두 생존을 위해 허덕이고 있습니다"라고 임군은 썼다.
“그러나 언론은 이 두 그룹이 생존하는 것을 계속 잘못 전달하고 있어서 흑인과 한인을 서로 맞서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마찰을 극복하려고 두 그룹은 매우 애쓰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썼던 임수현군이 UCLA출신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동안 이 학교에서 한인 2세 사회운동가들이 상당수 배출 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업을 마친후 이 나라에서 가장 잘못 인식되고 비방받고 있는 자기 민족을 대변하려, 정치사회 운동의 표면에서 싸우려, 내 고장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한인 청소년들에게 4.29가 거의 잊혀져가고 있는 10여년 후, 임수현군의 혼은 그의 모교에서 일부 4.29 자녀들간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사춘기에 포화의 세례를 당했던 이들 임수현 후예들은 환란의 기억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라티노, 흑인 이웃들과의 가교를 건설하려는 각오가 단단히 돼있다.
올 가을부터 UCLA에서 내가 가르치고 있는 ‘심층조사 저널리즘:캘리포니아의 지하 퍼시픽림 모자익 탐구’ 강좌에는 적어도 8명의 ‘4.29 자녀’가 수강하고 있다. 이것은 실험 강좌로서 모든 종족의 학생들이 인종간 팀웍을 이루어 LA의 소란한 도시현장에서 인종 커뮤니티에 영향미치는 날카로운 이슈들(갈등과 협동)을 탐색하고, 그 찾아낸 결과를 대학과 커뮤니티 언론에 집필하게 된다.
한인학생들이 내 강좌를 택하게 된 이유에는 4.29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나는 그들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혼란과 화재가 곳곳에 퍼져있던 그날, 6학년생이었던 조이스 전(디자인전공)은 한인타운의 체조교실에 있었는데 아버지가 그녀를 데리러 왔었다.
“무슨 위급한 상황이길래 아버지가 나를 학교에서 끄집어내려 하는 것일까 궁금해 가슴이 뛰었습니다.
“집에 당도하자마자 문과 창문은 즉각 잠궈졌고, 텔리비전은 특별보도로 달아올랐고 한국어라디오방송이 평소보다 더 소리 높게 틀어졌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사냥총과 총알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코니 창문에다 놨습니다.
“한인타운이 마침내 폭력에 휩싸였고, 한 블락 떨어져있던 작은 샤핑센터가 그날 저녁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그렇게 큰 화재를 본 적이 없었죠. 불이 우리에게 번져올까 겁이 났어요. 소방차는 오지 않았고, 사실 어떤 종류의 사이렌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부모님과 함께 밖으로 나가보았습니다. 아파트밖에 첫 발을 내디디는게 무척 겁이 났어요. 불탄 공터 모습은 기상천외였습니다. 그 건물에는 어머니와 함께 자주 같이 갔던 누메로우노 피자집이 있었고. 2층에 있던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곤 했었죠. 이 모든 것이 사라졌어요.
“그곳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습니다. 모두들 놀란 모습이었어요. 상점주인들이 피해 상태를 보기위해 왔을 때 그 침묵이 깨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리쳤고 어떤 사람은 울부짖었고, 그중 한사람이 미용실 주인임을 나는 알 수 있었습니다. 내 머리를 깎아주던 사람이었죠.
“이제, 많은 사람들이 폭동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에 비교적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고, 생각하면 화가 남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 화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비한인 고객들을 나쁘게 대했던 한인 상점주인들을 탓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한인과 흑인들을 싸움붙인 언론에 대해 다시 분개하게 됩니다."
조이스 전은 “누구의 잘못이며 해결책은 어디 있는가요? 비록 내 감정을 정리해낼 수는 없지만 한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LA폭동이 내 내부에 불을 질렀고 나는 그것을 어떻게 내쫓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요약했다.
캠퍼스 운동가인 테레사 강은 아버지의 비디오가게가 있는 사우스센트럴에 폭동이 났을 때 열세살이었고 겁에 질려 죽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폭동중에 아버지가 사우스센트럴 한복판에 가는 것을 내가 싫어했던것만 기억납니다"라고 한인학생회 부회장인 강양은 회상했다.
“아버지 가게가 파괴되거나 불타지는 않았지만 그일로 우리 가족 생활이 많이 달라졌습니다"라고 말했다.
“되돌아보면 그것은 다 신의 뜻인 것 같습니다. 폭동전에 나는 전형적인 작은 응석받이 한인 소녀로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무엇을 겪어왔는지 결코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가족이 어떻게 파산했고 내가 부모님에게 집앞뜰에 ‘for sale’ 표지판을 세우지 못하게 했던 것 또한 기억할 것입니다. 아버지가 집밖에서 조용히 왔다갔다 하면서, 아메리칸 드림의 끈을 잃어버린 것에 고통스러워 했던 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억들을 값지게 생각하고 있고, 이 고통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비록 미래가 어떠할지 알 수 없으나 나는 축복받았다 생각합니다. 한인이 된 것, 미국인이 된 것, 생을 잉태하는 여성이 된 것이 축복스럽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그것은 내가 나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을 것입니다."
대학원생인 수지 우는 몇살 더 위로 좀더 아는 게 많았으므로 아메리칸 드림이 연기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그녀 주변 사람들이 목격했던 운명의 날 이후 구제의 삶을 살아왔다.
4.29때 UC어바인 신입생이었던 그는 “독감에 걸려 기숙사 방에서 떨며 누워있었는데, 그때 전화가 울렸습니다. 어머니가 흐느끼면서 뉴스를 보았는지 물었습니다. 아니라고 대답하며 나는 TV를 켰지요.
“한 라티노 남자가 신발과 전자품을 한아름 안고 뛰어가고 있었고, 16살도 안돼보이는 흑인 소년이 그 사람 뒤를 따르며 훔친 물건을 갖고 도망가다 잠시 멈추고 카메라에대고 웃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길은 깨진 유리로 덮여있었고 건물 창밖으로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불길이 널름거렸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진정시키려 했습니다. 어머니는 나더러 방송국으로 전화해 모든 한인들을 위해 말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유 아메리카 너는 TV에 가서 똑똑함을 보이고 모든 한인을 위해 말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이 내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쳤는지 그당시는 결코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행동취하지 않았던 것을 오늘날까지도 나는 부끄러워하고 있지요. 어머니도 내가 세상을 구하리라 기대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아버지와 함께 1969년 이 나라에 이민올 때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을 내가 편들어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한때, 미국에 있는 것만으로도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후 나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자그마한 방식으로 과거의 부족함을 만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아웃리치 프로그램을 통해 LA의 다양한 커뮤니티와 일하면서 나는 흑인, 아시안, 라티노, 백인들사이의 대화부족이 폭동의 뿌리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지 우의 목표는 여러 피부색의 젊은이들이 겉모습을 넘어 내면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대화의 길을 열게 하도록 도심지 고등학교나 커뮤니티칼리지에서 교편을 잡는 것이라고 한다.
“1992년 폭동을 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커뮤니티를 재건설하는 하나의 작은 단계인 것같습니다"라고 수지우는 밝혔다.
“아멘” 이라는 응답이 저절로 나온다. 신이여 잊지 않는 이들 4.29 자녀들에게 복을 내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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