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군사와 궁예의 군사들이 철원성에서 처절하게 전투를 벌일 때 갈매기 한마리가 창공을 가른다.
한국 드라마사에 한 획을 그으며 지난해 4월1일 방송에 들어간 ‘태조 왕건’의 시작이다. 높이 비상하는 갈매기처럼 ‘태조 왕건’은 첫회부터 30%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지난 9개월동안 인기 고공비행을 하고 있다. 1월 들어선 40%의 시청률로 다른 모든 프로그램을 평정했다.
’태조 왕건’은 방송에서 좀처럼 접하기 힘든 고려시대를 다룬 드라마라는 점이 방송전부터 시청자의 눈길을 끌었다.
이전의 사극이 주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위인의 일대기를 조명하거나 여인들을 내세워 궁궐 암투를 그렸다면, ‘태조 왕건’은 통일 신라시대에서 후삼국으로 분열된 뒤 왕건의 고려 통일로 나가는 장대한 여정을 담았다.
방대한 제작규모, 높은 극적완성도
’태조 왕건’은 드라마의 규모면에서도 단연 최고다. 기획기간 18개월, 제작비 250억원이 소요됐다. 고려궁을 비롯한 문경새재 야외세트 설치비만 50억원에 이르고 의상비는 20억원에 이른다.
또한 최수종 김영철 서인석 등 주연급만 60여명에 이르고 보조 연기자는 한회당 평균 1,000여명이 동원된다.
이처럼 제작기간이 길고 규모가 크다고 해서 시청자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태조 왕건’에는 그외에도 시청자로부터 사랑을 받는 요인이 많다.
우선 ‘태조 왕건’은 강한 남성의 이미지를 내세운 ‘용의 눈물’과 같은 1인극 형식과는 달리 각기 다른 성격의 세 영웅이 등장해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카리스마가 강한 궁예의 역을 맡은 김영철의 광기어린 연기와 지와 덕을 겸비한 왕건 역을 맡은 최수종의 부드러운 연기, 호방한 성격의 견훤 역의 서인석의 선굵은 연기가 조화를 이뤄 극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왕건, 궁예, 견훤에게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특유의 리더십을 배울 수 있다. 사극은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현재성의 의미를 줄 때 성공하는데 ‘태조 왕건’은 이 점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
용인술, 리더로서 갖추어야할 덕목, 대인관계 등을 세 영웅을 통해 차별성있게 드러냄으로써 시청자에게 역사적 의미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과거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고려 건국을 중심으로 갈등과 대립을 극복화고 화합과 통합이라는 21세기의 시대 정신을 창출하겠다"고 밝힌 김종선PD의 기획 의도는 상당히 실현되고 있는 듯 보인다.
여기에 종간 아지태 등 책사들이 벌이는 파워게임은 권력과 야망, 처세의 방법을 묘사한다.
세 영웅과 책사들이 그리는 정치와 권력의 기상도는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 분할된 지역구도를 바탕으로 한 정치상황과 가신정치로 비난받고 있는 현정국과 맞물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태조 왕건’의 인기에 한몫 하고 있다. ‘용의 눈물’이 지난 대선정국과 연결되면서 인기가 증폭됐던 것과 같은 이유다.
영웅들의 사랑, 여성 시청률 높여
여기에 영웅의 사랑법도 또다른 재미다. 사극은 어쩌면 남성 시청자를 위한 장르다. 하지만 이번 ‘태조 왕건’은 여성 시청자도 많다. 원인 중의 하나가 왕건을 비롯한 영웅들의 사랑과 여인들은 여성 시청자에게 사극의 재미를 주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드라마적 허구를 적절하게 혼합해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작가 이환경씨의 역량도 ‘태조 왕건’을 인기대열에 오르게 하는 주요인이다.
이환경씨는 ‘전설의 고향’으로 데뷔한 뒤 주로 사극과 시대극의 극본을 써왔다. 사극으로서 예외적으로 높은 인기를 끌며 사극 붐을 조성한 ‘용의 눈물’도 그의 작품이다.
이환경씨는 ‘태조 왕건’을 준비하기위해 고려사에 관련된 논문, 문헌 등을 거의 구입해 탐독했다. 또한 중국에 건너가 북한의 고려사 연구물까지 구해보는 열의를 발휘했다.
"’태조 왕건’은 픽션이 가미돼있지만 정통사극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드라마를 구성해 나간다"고 말했다.
물론 ‘태조 왕건’의 흠도 있다. 사극은 조그마한 실수가 있더라도 전체적 흐름을 바꿀 수 있다. 우리나라 성씨는 고려시대 왕건이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나누어준 이후 확립 것인데도 극중에는 ‘왕 장군’, ‘궁 장군’, ‘견 장군’ 등 잘못된 호칭이 나와 극의 완성도를 저해하고 있다.
또한 대립구도를 의식해 극단적인 인물 설정과 인위적 부분도 적지 않은 것은 개선되어야할 점으로 지적된다.
궁예의 죽음, 화합의 정치 펼칠 왕건
이처럼 인기를 끌고 있는 ‘태조 왕건’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156회 예정으로 9월말 종영될 ‘태조 왕건’은 14일 84회를 방송했다.
그동안 드라마에서 궁예가 권력의 정점에 부상하는 과정이 전개됐다면, 앞으로는 궁예의 파멸과 왕건의 등극을 위한 정지작업이 드라마의 주내용을 이룬다. 종간의 왕건에 대한 견제와 왕건의 반격, 그리고 장인과 부인, 아들까지 죽이는 궁예의 광폭한 행동이 이어진다.
3월 중순 타락한 궁예가 죽음을 맞게 된다. 드라마에선 궁예의 죽음은 거리에서 백성에게 돌로 맞아죽는다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내용과는 달리 철원성에서 왕건에 최후까지 항쟁하다 죽는 것으로 그려진다.
안영동 책임프로듀서는 "후반부에는 견훤의 모습이 비교적 많이 다뤄진다. 왕건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궁예와 견훤의 갈등 속에서 자연스럽게 화합과 덕의 정치를 구현하는 왕건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드라마가 전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카리스마가 강한 조선시대 왕들의 모습에 익숙한 시청자들은 모처럼 다른 모습을 보이는 왕건이라는 캐릭터에 당혹하면서도 또다른 지도자상을 본다. 10월부터 방송될 고려초기 시대를 다룬 ‘제국의 아침’에선 왕건의 역사적 공과가 확연히 들어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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