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밀레니엄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던 2000년도 어느덧 저물어간다. 지난 한해동안 LA한인사회는 남북정상회담과 이산가족상봉등 본국서 날아온 희망의 뉴스들로 잠시나마 통일에 대한 기대에 부풀기도 했지만 연말에 접어들면서 잇달아 발생한 강력사건들로 인해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한인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각종 사건·사고들을 현장에서 직접 취재했던 사회부 기자들이 지나간 취재수첩을 정리해 봤다.
참석자: 권기준 부장, 하천식, 황성락, 조환동 차장대우, 구성훈, 김종하, 이재진, 김수현 기자
-올 한해도 다사다난했습니다. 연초에는 비교적 큰 뉴스없이 평온한 분위기였던 한인사회는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평양회동으로 술렁이더니 연말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강력사건과 사고소식으로 긴장감이 돌기도 했습니다.
▲대낮에 LA한인타운 인근 행콕팍에 있는 고급콘도 주차장에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한인여성(18)이 성폭행을 당하는가 하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남지연(20)양이 무장강도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등 연말들어 강력사건이 잇달아 발생했습니다. 이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건이 터지자 많은 한인들은 "목숨을 내놓고 살아야 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인가"라며 개탄하기도 했습니다. 내년에는 강력사건없는 한인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지난 11월29일 밤 앤젤레스 내셔널포리스트에서 불에 탄채 발견된 이태홍씨 피살사건은 미스테리한 사건자체의 성격 뿐만아니라 이씨가 정원식 전 국무총리의 둘째사위라는 사실때문에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씨가 다녔던 미주성산교회 교인들은 처음에는 가정적이고 온순한 성격인 이씨가 강도에게 납치·살인됐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이씨가 사격장에 자주 출입했고 지갑 또한 사격장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건에 대한 의혹을 갖게됐습니다. 저희도 전 국무총리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추측보도는 삼가하려고 신경을 썼지만 경찰 수사가 뭐하나 속시원히 밝혀진게 없는데다 유가족 역시 언론 접촉을 철저하게 피하는 바람에 소문과 추측만이 무성했습니다.
▲음주운전을 하다 프리웨이에서 교통사고를 일으켜 2명을 숨지게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기소된 곽나현(26)씨 사건은 음주운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연말을 맞아 가뜩이나 술을 마시는 모임이 잦아지면서 과음을 하는 한인들이 상당수에 달했는데 이 사건을 교훈삼아 한인들의 음주문화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지요. 야간업소 관계자들은 곽씨사고때문에 저녁 술손님이 줄었다고 푸념을 하기도 했습니다.
▲곽씨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알려졌는데 인정신문에 나온 곽씨의 얼굴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범죄자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직 앳된 얼굴에 순진해 보이는 그녀가 범죄를 저질러 실형을 살 위기에 처해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정말 한번 실수가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감은 물론 자신의 인생까지도 망칠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어요. 부득이하게 술을 마셔야 할 경우 술이 완전히 깰 때까지 운전대를 잡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술 얘기가 나왔지만 지난 4월 뉴포트비치에서 발생한 백인향씨 총격피살 사건도 따지고 보면 술이 한 원인이었습니다. 경찰의 수사결과 숨진 백씨는 물론 살인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한채정씨와 지금영씨 모두 사건당시 만취상태였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비록 이들이 동반자살이라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멀쩡한 상태였다면 이같은 비극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치노힐스 이정복씨 피살사건의 용의자가 다름아닌 의붓아들로 밝혀지면서 한인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습니다.
▲이 사건은 의붓아들 김대성군이 돈을 주고 친구들에게 살인을 청부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한인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습니다. 한인들은 김군이 훔친 아버지의 크레딧카드를 친구들에게 나눠줘 친구들이 이것을 갖고 스테이크등을 사먹었다는 사실과 자신이 체포될 경우를 대비해 보석금을 준비했다는 검찰의 기소내용이 공개되자 분노의 차원을 넘어 허탈감에 빠지기고 했습니다.
▲본보의 끈질긴 노력으로 김군이 수사관들에 의해 요양소에서 수갑을 차고 나오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당시 김군은 주차장에 세워둔 차안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기자들을 발견했지만 아무말 없이 차에 올랐는데 짧은 순간이었지만 엄청난 긴장감이 맴돌았습니다.
▲지난 9월21일 자신들의 생후 2개월된 아들을 위험한 상태에 방치해 숨지게 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혐의점을 찾지못해 풀려난 장선남(21), 황지영(20) 커플은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나 부모들 몰래 동거와 임신, 출산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결국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아이를 키우려다 이러한 사고를 당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특히 이들은 집에서 아이를 낳고 그 다음날 타운내 한 병원에 찾아갔으나 의료보험이 없다는 이유로 병원측으로부터 차가운 냉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씁쓸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97년 한국에서 약혼녀를 공모살해후 암매장하고 미국으로 밀입국해 3년간 도피행각을 펼치다 지난 10월17일 롱비치에서 체포된 최수혁(31), 정효실(29) 커플 본국송환도 큰 뉴스였습니다. 이들은 사우스센트럴, 롱비치지역을 전전하며 ‘김성필’ ‘김현미’라는 가명을 쓰며 살아왔지만 결국 꼬리가 잡혀 ‘죄짓고는 못산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올해는 노인회 문제로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지난 7월 한인사회의 성금으로 마련됐던 한국노인회관이 불과 1만달러의 재산세를 체납하는 바람에 경매에 넘겨지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경매사태에 책임이 있는 정의식 노인회장은 처음에 기자와 만났을 때 영어를 잘 몰라서 돈을 안냈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더니 나중에 가서는 카운티 정부가 행정상의 실수로 문제를 일으켰다고 책임을 전가해 많은 이들의 비난을 샀습니다. 결국 경매사태는 카운티 정부의 선처로 무난히 매듭됐지만 한국노인회는 이후 재정난으로 회원들의 상조비를 제대로 지급을 못해 또다시 물의를 일으켰지요. 노인회도 더 이상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해서는 안되며 근본적인 체질개선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안겨줬습니다.
-큰 사건들이 많았지만 한인사회에 기쁨을 가져다 준 일도 많았던 한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신문재씨의 아버지 상봉, 남가주 한국학원 회생 등은 희소식이었습니다.
▲노스리지에 거주하는 신문재씨가 50년만에 북에 거주하는 아버지 신용대씨를 서울에서 만나 뜨거운 포응을 나누는 모습은 민족분단의 아픔을 갖고 있는 한인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신씨 스토리는 본보가 특종보도한 것이었는데 1차상봉에서 제외되자 기자의 입장에서는 사실 보도가 나간 것이 오히려 신씨 부자의 상봉에 방해가 되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을 갖고 있었는데 상봉이 이뤄져 한숨을 놓았지요.
▲올초 범교포적 차원으로 전개된 ‘남가주 한국학원 살리기 운동’은 불과 4개월동안 모금된 액수만 250만달러에 달해 4.29폭동 발생후 미주한인사회에서 505만달러가 모금된 이후 최고를 기록했지만 그보다는 동참한 한인 기부자들의 따뜻한 온정으로 한인사회 전체를 훈훈하게 만들었지요. 지면이 없어 이들 기부자들의 아름다운 스토리를 소개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매영숙 재단이 100만달러를 퀘척한 사실도 신선한 충격이었지만 한 이사는 수만달러의 거금을 공개적으로 기부하고 추가로 10만달러를 익명으로 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이사의 뜻을 존중해 신원을 확인하고도 결국 보도하지 않았지요.
▲10월31일 대만공항에서 발생한 싱가폴 항공기 추락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제임스 백씨가 무사히 집에 돌아와 가족이 마련한 생일상에서 케익의 촛불을 부는 모습은 참으로 행복해 보였습니다. 당시 사고소식을 접했던 본보는 즉각 대만과 싱가폴에 본부를 둔 항공사에 계속 국제전화를 걸어 유일한 한인탑승자였던 백씨의 신원파악은 물론 인터뷰까지 마쳤지만 그때가 LA시간으로 이미 자정을 넘어 결국 이틀후 지면에 소개돼 기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김이 새기도 했습니다.
-이민관련 사건도 유난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한인사회가 이민사회인만큼 이민사기가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올해는 특히 어느해보다도 크고 작은 이민사기가 발생, 한인사회에 충격을 주면서 당사자들에게는 절망감과 재정적 피해를 입혔습니다. 특히 윌셔합동법률사무소 케네스 김씨의 경우는 피해자만 수백명에 달해 역대 이민사기 사건중 최대규모를 기록했고 캐나다 밀입국을 통해 한국인 21명이 한꺼번에 체포된 것은 미국에 들어오기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국인들의 처절한 실태를 부각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허위 운전면허증과 이민신청을 위해 여권과 출생증명서와 소셜 시큐리키 카드를 위조한 유광호씨 체포사건은 한인이 직접 서류를 위조해 한인사회에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각종 이민사기는 사이비 브로커의 범죄행각이 1차적 원인이지만 사정이 다급하다고 편법을 용인하는 한인들의 책임도 면죄될 수 없습니다.
-이밖에 대선, MTA노조 및 카운티 공무원 파업등 한인사회와 연결된 주류사회의 중요 이슈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MTA 버스파업 현장을 직접 취재하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수십명에서 많아야 100∼200명 참가하는 미국의 일반적 피켓시위와는 달리 이들 노조원들의 시위는 상당히 조직적이고 과격한 양상을 띄어 미국내 노조의 파워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2,000명 이상 모인 집회에서 노조간부가 선동적 연설이나 집회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 마치 한국의 시위양상을 방불케 했었지요.
▲사상 초유의 재검표와 법정소송 공방으로 선거후 36일이 지나서야 당선자가 결정된 올해 대선 사태는 한인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부시 후보의 당선이 결정되자 고어를 지지했던 한인들은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정치적 결정에 불과하다며 울분을 터뜨리는등 한인들도 지지하는 후보에 따라 양분현상이 심하게 나타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극적 반전이 반복된 이번 대선 드라마 때문에 한인들의 미 정치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습니다. 또 선거전에는 한인 유권자들이 민주당인 고어후보를 더 많이 지지할 것으로 여겼었고 또 출구조사 결과 한인들의 고어 지지도가 실제 더 높았던 것으로 나타났지만 선거 당일 투표소에서 직접 만나본 유권자들 중에는 오히려 부시를 찍었다고 밝힌 한인들이 더 많아 좀 의아해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어쨋든 2000년은 상반기 실시됐던 인구센서스와 하반기의 대선을 거치며 미주한인들의 참여의식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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