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를 떠나 강릉으로 향하는 열차. 호기롭게 올라탄 S대 경영학과 학생 70명은 역을 통과할 때마다 퀴즈를 푼다. 퀴즈를 못맞히면 바로 다음 역에서 강제하차당한다.
기차가 추천역에 다다른다. 이때까지 살아남은 이는 여학생 두명 뿐이다. 그러나 이들마저 고난도 퀴즈 벽을 뚫지못한 채 몹시 아쉬워하며 열차 밖으로 내려간다. 시간은 이미 늦은 오후다. 기차도 제대로 서지 않는 외진 곳, 추전역에서 어떻게 서울로 돌아갈 것인가.
알아서 가야 한다. 서바이벌, 즉 생존게임이기 때문이다. KBS 2TV ‘한국이 보인다’ 중 ‘퀴즈 트레인, 역전의 용사’의 한 장면이다.
TV 예능 프로그램이 서바이벌 게임에 재미를 붙였다. 특히 토요일 저녁 시간대 프로들은 살아남기 경쟁으로 점철돼 있다시피 하다.
KBS 2TV ‘자유선언, 오늘은 토요일’은 ‘생존게임, 끝까지 남는다’를 보여준다. SBS TV ‘좋은 예감, 즐거운 TV’는 해외로 무대를 옮겨 ‘서바이벌 보물찾기’를 방송하고 있다. 여기에 MBC TV ‘목표달성 토요일’은 서바이벌 게임 형식의 ‘동거동락(同居同落)’ 코너로 맞서고 있다.
’자유선언.’은 "한 집에서 연예인 10명이 하룻밤을 함께 지내면서 인기투표 결과에 따라 하나둘씩 탈락하는 포맷을 ‘목표달성’이 뒤늦게 따라하고 있다"며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고 있다. 경쟁프로끼리도 ‘살아남기’위한 눈치ㆍ머리 싸움이 치열하기만 하다.
이들 서바이벌류는 고립형과 이동형으로 대별된다. ‘생존게임, 끝까지 남는다’와 ‘동거동락’이 고립형이라면 ‘퀴즈 트레인.’과 ‘서바이벌 보물찾기’는 전형적 이동형이다.
시청자의 가학욕구, 왕따심리 충족
서바이벌 프로는 시청자의 가학욕구를 일정 부분 충족시키려고 공을 들인다.
탈락자를 찍는 컷을 보면 이같은 속셈이 자명해진다. 쓸쓸히 돌아서는 패배자의 처진 어깨, 고개를 푹 숙인 채 괴로워하는 모습을 애조 띤 백 그라운드 뮤직에 실어 비춰준다. 탈락자가 인기 높은 스타일수록 지켜보는 이들의 쾌감도 더욱 커진다. ‘그것 봐라.너희들도 비참하게 떨어질 때가 있지?’
서바이벌 게임의 기저에 집단 따돌림, 이른바 ‘왕따’ 심리가 깔려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왕따’를 강조하는 것만은 아니다. 경쟁 자체에 포커스를 두는 방식도 득세하고 있다. 생존하기 위해 무진 애쓰는 모습, 땀 흘리는 장면을 바라보며 재미를 맛보라고 한다.
서바이벌의 유행은 TV에 국한되지 않는다. E 건강 사이트는 7주 과정 ‘다이어트 서바이벌’을 마련했다. 인터넷이용자 중 희망자 7명을 선정해 벌인 이 공개 다이어트 행사의 우승자는 성형수술비와 피부미용권 등을 챙겼다.
월요일마다 동영상으로 다이어트 서바이벌 게임 참가자의 성과를 공개하면서 매주 한명씩 탈락시켰다. 출입을 금지당한 공간 안에서 오로지 인터넷만 활용, 음식 등 생존 필수품을 구해 일정기간 동안 살아남으면 포상하는 게임도 속속 출현하고 있다.
냉혹한 게임의 법칙만이 존재
이같은 인터넷 서바이벌을 대하는 시각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D인터넷업체 등이 주최한 인터넷 생존게임 참가자 중 한명은 "극한상황에서 정말 생존하는지를 보는 것도, 특정한 가설을 검증하는 것도,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드러내게 하는 것도 아니고..애매모호하다"고 전했다.
생존그룹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밖에 나와 네티즌이 나에 대해 올려놓은 글을 읽어보고 상처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신문에 뒷말이 오르내리는 연예인의 심정을 알 것 같다"고 한숨지은 탈락자도 있다. 오락적 요소가 다분한 TV나 인터넷용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하는 남녀는 이처럼 쉽게 인간적 모멸감에 휩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오락성 짙은 서바이벌 게임의 기획자들은 "참가자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낙오자의 쓸쓸한 모습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동정과 감동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게끔 만드는 휴머니즘이 깃들어 있다"면서 "인생사가 곧 서바이벌 게임임을 자각토록 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함께 게임하던 친구를 제 손으로 탈락시켜야 살고, 스스로도 언제든 낙오자가 될 수 있는 냉혹한 게임의 법칙이 과연 동정심과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는 지는 미지수다.
작금의 서바이벌 붐 이면에 숨은 뜻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또다른 서바이벌 게임은 공허한 도시의 일상을 춤추고 있다. 장소는 철과 유리의 기괴한 합작물인 서울 강남의 포스코 빌딩.
현대무용가 조양숙씨가 안무한 공연명이 바로 ‘서바이벌 게임’이다. 춤에는 무한경쟁으로 인한 피로가 녹아있다. 무대는 도시 분위기를 내려고 갖가지 테크놀로지의 상징물을 끌어들였다.
먼 배경은 유리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무대와 그 사이에 드리워진 얇은 반투명막에는 공연 틈틈이 지하철 출퇴근자의 바쁜 걸음, 도심거리를 메운 인파의 무표정이 투영된다. 실내는 쿵쾅거리는 테크노 뮤직으로 채워진다.
녹음된 전자음악과 공연장에 설치된 신서사이저의 인공 음향이 숨막히는 분위기를 돋운다.
어느새 나도 생존경쟁 속으로
관객이 감지하지 못하지만 이 소리를 만드는 법은 실험적이다. 음악을 위해 무용수의 몸에, 무대의 바닥과 둘레에 온통 센서를 부착했다. 음악이 그냥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용수가 필요로 할 때 나오도록 장치했다.
무용수가 마치 DDR을 추듯 바닥의 센서를 밟으면 음악이 터져나오고 무대 옆 스피커에 가까이 가면 음악소리가 더 커지는 식이다.
무대 위의 스토리는 ‘무자비한 경쟁’이다. 경기에서 우승하려는 두 육상 선수의 고된 훈련, 희열과 좌절의 교차, 실패자의 재도전이 피곤하게 이어진다. 안무자는 묻는다. "이 서바이벌 게임이 바로 당신의 일상은 아니냐"라고.
텔레비전과 인터넷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서바이벌 게임을 구경하면서 게임의 멍석을 깔아준 주최측이 계산해 제공한 우월감의 포로가 돼버린 시청자와 네티즌. 화면에서 눈을 돌려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 이들도 이내 정글같은 생존경쟁 속 서바이벌 게임의 참가자가 되고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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