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복도에서 휠체어에 앉은 흰머리 한인 할머니에게 인사하자 할머니는 이빨이 빠져 잇몸만 보이는 채 웃으며 “그래, 나에게 가보라고 당신을 보냈군. 마침내 답을 한 셈이야. 당신이 나를 보러온 건 참 좋은 일이야.”라고 말했다.
그녀는 주름진 작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내가 그녀를 끄집어내지 않으면 그 작은 몸체가 의자에 푹 파묻혀버릴 것처럼 보였다.
최근, 나는 한 특수 양로병원의 소셜 워커로부터 의뢰받고 이 한인 할머니를 그곳으로 찾아갔었다.
그 소셜워커는 미세스 김의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해주었다.
“우리 직원들은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상태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직원들과 다른 환자들을 때려요. 카운터위의 종이 뭉치를 밀어버리고는 직원들을 향해 웃고 의도적으로 그런 짓을 합니다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불안하고 파괴적인 환경을 만들죠. 이제 우리는 중재가 최후의 방도라 생각합니다.”
미세스 김은 “나는 1백살 하고도 아홉 살이다”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는 92세다. 그는 개성에서 태어나 미국에 오기 전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방문했을 때 “나는 서울에 살고 있소. 이곳은 서울이요. 나는 내 고향 개성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미국에 온 것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점심 식사가 나왔다. 접시에 담긴 진한 그레이비가 곁들여진 쇠고기패티 튀김을 내가 자르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손을 멈추게 했다.
“내가 직접 하는 게 좋아.”라고 말했다. “나를 도우지 마. 그걸 먹으면 설사하기 때문에 어쨌든 나는 그걸 먹지 않을 거야.” 쇠고기패티와 양파링을 가르키며 그녀는 빨리 내게 말했다. 주저함 없이 그녀는 무엇이든 먹지 않는 이유를 내게 알려주었다.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그는 집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내게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때때로 좀더 크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미세스 김은 의사소통을 꽤 잘 할 수 있었고 필요한 것을 아무 어려움없이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녀는 사랑스러웠으며 현명했고 “80세가 되면 눈이 잘 안보이고 귀가 잘 안들리게 돼요. 이런 모든 문제가 나이와 함께 와요.”라고 말해 나를 놀라게 했다.
미세스 김은 내가 묻기도 전에 “다른 사람을 때리는”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그것으로 그녀의 망상적인 이야기는 시작됐다.
“이 사람들을 봐.”라고 말했다. “그들이 잠자는 걸 보았어? 그건 나빠, 나쁜 짓이야. 여기는 절이야. 우리는 절 안에 있어. 절안에서 자는 것은 부처님에게 불경스런거야. 그래서 깨어있으라고 그들을 때리는 거야. 잠자는 대신 귀기울일 수 있게 말이야.”
그녀가 비록 치매와 망상을 겪고 있으나 다른 사람을 때리는 이유를 명료하고 납득할 만하게 제시했다. 그녀의 작은 세계에서는 그것이 온당한 일이었다.
놀랍게도 미세스 김은 주변 소음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잠자는 주변 사람들, 눈감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왜 불편해하는지 궁금했다. 낯선 곳에서 낮익지 않는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미세스김은 자신에게 의미없는 말 소리에 귀를 닫았는지도 모른다.
비록 모든 시간 관념을 잃었더라도 그녀는 사고의 막힘없이 대화를 이어갈만큼 또록또록했다. 조용히 흐르는 냇물처럼 자신의 어린 시절과 고향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그곳에 돌아갈 차비가 되어있어.”라고 말했다. “아마도 내년일거야.”
혼자 있을 때 행복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있으면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특히 사회적 통합이 없거나 다른 사람과 의미있는 유대를 갖지 못할 때 고향을 그리게 된다. 미세스김의 신체적 요구는 그곳에서 충족되지만 정서적, 심리적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인간관계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욕구의 하나다. 이 욕구가 어떤 이유에서건 채워지지 않을 때 정서 불안으로 인해 불행해지고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옛 한국인들이 “이웃 사촌”이라고 말하듯 신체적으로 가까이 있으면 우정과 친근함이 커진다. 그렇지만 이 근접원칙은 서로간의 상호작용을 내포하고 있다. 서로 말을 나누거나 명백한 상호작용이 없이는 이웃이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그는 남인 것이다. 미세스김에게 있어서 주변사람은 모두 낯선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매일 일어난 일을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우리의 자아개념 상당부분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개인 안정성의 중요한 근원인 관계를 쌓아간다. 잘 확립된 관계는 우리 삶에 질서를 가져다주고 행복에 필수적으로 된다.
고국과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미세스 김은 이 양로병원에서 사람들과 유대감을 느낄 필요가 큰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파괴적인 행동으로 반대되는 메시지를 전달, 사람들을 멀리 내쫓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쌓아가기보다는 파괴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게 미세스김으로서는 어떤 면에서 그들과 연결되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흥분이 내포된 관심을 얻게 되며 그것은 살아있음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는 힘을 느끼고 불안을 조절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마도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고독감과 향수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주변사람들이 깨어있고 그녀와 영적 경험을 가지길 원한다. 다른 사람을 깨우는 것은 자신이 깨어있길 바라는 희망을 표현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나는 “잠자는 것”이 그녀에게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미세스 김에게는 그것이 살아있지 않는 것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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