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볼륨’이 커진지는 이미 오래다. 영화 시장의 몸집도 커졌지만 작품 자체의 덩치도 몰라보게 커졌다.
강제규 감독이 ‘제작비 20억 원 가량의 작품을 기획한다’고 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던 때가 불과 2년 전이었다. 그 작품이 바로 <쉬리>였다. 하지만 이젠 제작비 20억 원짜리 영화는 그저 보통 수준으로 치부된다. 4~5년 전 만해도 ‘그렇게 많이?’라며 입 벌리게 만들었던 10억 원대 작품은 이제 ‘저예산 영화’로 받아들여질 정도다.
한국 영화에도 바야흐로 블록버스터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셈이다.
▩ 기점과 원동력은?
<쉬리>는 ‘역사적인’ 작품이다. 역대 최고의 흥행 성적도 ‘역사적’이지만 그보다도 한국 영화계의 사고 범위와 구조 자체를 바꿨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
한때 우리는 할리우드 영화 <쥬라기 공원>의 수익이 현대 자동차의 1년 수출액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입을 다물지 못한 적이 있다. 고부가 산업의 현실적인 크기를 처음으로 실감한 때문이었다.
<쉬리>는 한국 영화계에 <쥬라기 공원>과 같은 의미를 던져줬다. 총 수입이 1000억 원대에 이른 <쉬리>는 ‘우리도 영화 한 편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심어주며 영화 시장의 활성화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영화계에 돈이 몰리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일기 시작한 벤처 자본 붐도 크게 한몫 했다. 영화가 벤처 산업은 절대 아니나 투자할 곳을 찾고 있던 벤처 자본들이 영화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영화인들은 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올해의 블록버스터 시대 개막이었다.
▩ 누가 있나?
현재 한국에선 순수 제작비 30억 원 가량의 작품을 블록버스터라고 지칭한다.
할리우드 본래의 블록버스터 제작비와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이나 협소한 국내 시장을 감안하면 30억 원대 영화는 분명 블록버스터라 할 수 있다.
국내에서 블록버스터라 자칭하고 나선 첫 영화는 98년의 <퇴마록>이다. 20억 원 가량을 투입한 <퇴마록>은 허술한 작품 구조에도 불구하고, 규모에 매혹된 관객을 모으는데 성공해 서울에서만 41만 9,200명의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그 다음이 작년의 <쉬리>다.
올해는 <아나키스트> <비천무> <공동경비구역 JSA> <싸이렌> <단적비연수> <리베라 메> 등 무려 여섯 작품이 차례로 쏟아졌다. 제작비 규모 또한 더욱 커졌다. 이 여섯 작품은 모두 30억 원대를 넘는 제작비가 투입됐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개봉 당시부터 전국 100만 관객을 손익 분기점으로 삼았다. 남들은 평생 꿈으로 여기는 숫자를 최저 목표로 삼았으니 최근 1년새 영화인들의 사고 구조 자체가 ‘혁명적’으로 바뀌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 성적표는?
그러면 그 결과, 흥행 성적이 궁금해진다.
블록버스터에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작품성을 따지는 일부 영화인들도 있긴 하지만 오락영화의 최정점에 서 있는 블록버스터의 성적은 역시 흥행 결과로 매겨야 된다.
그런 점에서 올해 쏟아진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은 전체적으로 이익을 남겼다. 재앙에 가까운 참패를 당한 ‘재앙영화’ <싸이렌>을 제외한 <공동경비구역 JSA> <비천무> <아나키스트> 등이 모두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현재 상영 중인 <단적비연수>와 <리베라 메>도 현 추세대로 라면 ‘대박’을 일궈낼 전망이다.
특히 이 가운데 <공동경비구역 JSA>는 기록적인 흥행 성공을 거뒀다. <쉬리>의 최다 흥행 기록을 깨기 위해 지금도 상영 중이다. 올 연말까지 상영한다면 <쉬리>의 흥행 기록을 깨는 것이 확실시되며 그렇게 되면 100억 원 이상의 순익을 남길 수 있다.
<비천무>는 블록버스터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이란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비천무>는 개봉과 동시에 격렬한 찬반 양론에 휩싸였다. 일부에선 ‘속 빈 강정’이라 손가락질 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현란한 액션을 즐기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흥행 결과는 전국 200만. ‘블록버스터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외치는 듯 했다.
▩ 다음은?
내년엔 더욱 커진 블록버스터들이 관객을 찾을 전망이다.
촬영을 마치고 후반 작업 중인 여명의 <천사몽>이 1월에 맨 먼저 테이프를 끊을 예정이다. 그 다음은 중국에서 올로케이션으로 촬영하고 있는 <무사>(싸이더스, 김성수 감독)가 대기하고 있다.
정우성 주진모 안성기 장지이 주연의 <무사>는 벌써부터 ‘대박’ 예감을 진하게 풍기고 있다.
기획 중인 블록버스터도 많다.
<제노사이드> <로스트 메모리즈> <내추럴 시티> 등이 이미 구체화됐다. 이 가운데 <내추럴 시티>는 시나리오대로 찍으려면 60억 원 가량의 순수 제작비가 소요되는 엄청난 대작이다.
완성 여부를 떠나 ‘60억 원 짜리 상상력’이 등장했다는 점은 최근 한국 영화계의 새로운 분위기를 웅변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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