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끝나면 그 결과에 불복하고 낙선자측에서 부정선거, 금권선거, 관권선거를 규탄한다던지, 혹은 선거무효소송 제기하는 광경을 익히 보아왔다. 그런 모습은 모국에서나, 혹은 미주 한인 사회에서 보는 모습이거니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도 비슷한 모습을 보게 되니 흥미와 염려를 불러온다.
예외없이 낙선했거나 혹은 낙선의 가능성이 높은 후보자쪽에서 문제를 들고일어난다. 승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신이 이긴 선거결과를 법정으로 끌고 가려고 하지 않는데 반하여 패자의 입장에서는 어찌해서든지 흔들어보고픈 심정이 생기게 마련이다. 88올림픽 대회시 한 권투선수가 판정패를 당하고서 링에서 내려오기를 거부한 사건이 있었다. 잠시후 코치 감독등이 우르르 링 위로 뛰어 올라가서 심판에게 항의하던 불상사가 있었다. 이런 추태를 온 세계로 TV 방영한 다음날 조간신문은 ‘불공정한 심판으로’ 야기된 항의사건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럴듯도 하지만 실은 ‘게임에 졌기 때문에 일어난 불상사’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리라. 불공정한 심판이라도 자신이 이겼다면 이렇게 항의하지 않았으리라. 패자의 법정투쟁의 변으로 ‘자신이 패해서라기’ 보다는 ‘차후의 심판의 공정성을 위해서’ 혹은 ‘민주주의 과정을 보호하기 위해서’ 혹은 이번 미 대통령선거에서 처럼 ‘유권자의 권리보호의 차원에서’ 혹은 ‘민주제도 보호’를 위하여, 등등 거창하고도 엉뚱한 이유를 들이댄다.
’법정판결이 정답인가’ 하는 질문도 던져 보아야 한다. 30여년전 ‘무즙사건’이 치맛바람을 타고 한국교육계를 강타한적이 있었다. 시험문제에 식후 소화촉진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를 고르라는 질문에, 정답은 물론 ‘디아스타제’ 였다. 그런데 무즙을 정답으로 고른 수험자들의 부모들이 이것도 정답이 될 수 있다고 항의 한데서 급기야는 법정투쟁까지 끌고 갔었다. 결과적으로 무즙도 정답으로 채점하도록 판결이 나왔었다. 돌이켜보면 억지였다. 물론 무즙속에 디아스타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디아스타제라는 소화효소가 엄연히 정답으로 버티고 있는 바에는 가장 맞는 답으로서는 디아스타제가 틀림없는 사실이었는데, 그 시절의 법 논리로는 엉뚱하게도 무즙도 맞는 답으로 하도록 판결이 났었다. 법정에서 물론 해답은 얻었지만, 정답을 찾을 수 없다는 좋은 증거가 된다.
투표지에 자신이 원하는 후보자의 이름 옆에 정확히 펀치하여서 구멍을 내는 것은 당연한 유권자의 의무이다. 반쯤 펀치됐거나 펀치된 부분이 떨어져 나가지 않은 경우는 컴퓨터가 무효표로 인식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이다. 자신이 낙선되었다고 해서 컴퓨터에 인식되지 않은 표까지도 수개표로 몇 표를 더 얻고 그런 방법으로 밀어붙여서 운이 허락하면 대통령이 되고자 할 때에 문제는 ‘어디까지 언제까지 정확도를 위해서 투쟁할 것인가?’ 하는 난관에 부딪힌다. 컴퓨터로 재검표하여 격차가 줄어들자 다시 손으로 재재검표하도록 요구하는 의도는 ‘아직도 그가 패자’ 이기 때문이리라.
문제는 만일에 이런 논리가 적용된다면 왜 하필이면 대통령선거에서만 이랴? 왜 오로지 플로리다에서 만이랴? 전국적 수검표와 시의원 연방의원등 모든 선거에서 결과에 승복하기보다는 손으로 하는 재검표를 요구하는 억지가 생길 수 있는 선례를 열어준 셈이다. 투표용지 자체가 컴퓨터 식별이 용이하게 되도록 만들어졌고, 투표한다는 자체가 이런 컴퓨터 식별을 위해서 구멍을 내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투표의 규정이다. 반쯤 떨어진 구멍조차도 식별해 내어서 유권자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선거방식에 대한 도전인 것 같다. 한 표차이로 지더라도 진 후보는 선거의 룰을 따르고, 선거결과에 승복하고 승자를 축하하며 다시 국정에 합심하는 전례를 따라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패자가 공헌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 과정의 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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